그리스도인과 전쟁, 그리고 평화
그리스도인과 전쟁, 그리고 평화
  • 이상규 교수
  • 승인 2023.05.2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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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_이상규 석좌교수(백석대)
한국기독교학술원 공개 세미나에서 강의중인 이상규 교수. 최상현 기자.
한국기독교학술원 공개 세미나에서 강의중인 이상규 교수. 최상현 기자.

*본 강의안은 지난 5월 25일, (재)한국기독교학술원이 ‘기독교와 Ideology’를 주제로 개최한 공개 세미나에서 발제된 내용 중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만행은 전쟁이다. 살인이 가장 극악한 죄라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 전쟁에 아무 책임이 없는 민간인들이 전쟁수행자들(군인)보다 더 많이 죽거나 다친다는 것은 전쟁이 한 두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권을 유린하고 정의를 파괴한다.

손봉호 교수의 지적처럼, 우리는 흔히 행위자의 동기에 따라 그 행동의 옳고 그름을 평가한다. 그래서 고의적 살인만 죄악이지 과실치사나 전쟁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의도하지 않는 살상은 큰 죄악이라고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행위주체에만 초점을 맞추는 잘못이다. 훨씬 더 중한 것은 피해자와 피해자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다. 고의적 살인이나 실수 혹은 전쟁에서 살인이나 피해자의 죽음에는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전쟁에서 우연히 죽었다고 해서 고의적 살인행위로 인한 죽음보다 덜 억울하거나 덜 고통스런 것은 아니다.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힘의 정도가 과거의 어느 때보다 커졌고, 그 방법 또한 다양해진 오늘날에는 사람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피해자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 평등의 원칙에 부합되고 그것이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현대의 윤리는 행위주체 중심적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적이어야 한다. (중략)

정당전쟁론

이상에서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루터의 정당전쟁론(도덕적으로 양심의 가책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전쟁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소개했는데, 정리하면, 전쟁은 언제 어디서나 심각한 폭력과 파괴, 그리고 인명의 살상을 동반하기 때문에 전쟁이 없는 샬롬의 상태가 가장 좋은 현실이지만, 인류의 역사란 전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인류는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인식에서 출발한 정당전쟁론에서 정당한 전쟁이 되기 위한 조건을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전쟁을 향한 정의’ 곧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정의를 말한다.

둘째는 ‘전쟁에서의 정의’ 곧 전쟁 수행 과정에서의 정의가 그것이다. 전자는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이 무엇인가의 문제이고, 후자는 전쟁 수행 과정에서 그 전쟁이 정의롭기 위해서 지켜야 할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 정의로운 원인: 전쟁을 하는 이유가 공격당한 나라를 방어하는 것과 같이 심각한 악에 대한 정의여야 한다.

2. 국가의 권위자에 의한 전쟁: 전쟁이 개인이나 사적인 특정 집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합법적인 권위자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된 전쟁이어야 한다.

3. 정당한 의도: 전쟁의 의도가 다른 나라에 대한 복수나 약탈, 파괴가 아니라 파괴된 정의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4. 최후의 수단: 전쟁은 다른 모든 수단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5. 상대적 정의: 전쟁 당사국은 적국보다 더 도덕적이어야 한다.

6. 승리의 가능성: 전쟁은 이길 수 있는 상당한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만 시행되어야 한다. 또 전쟁의 결과가 고통과 악을 능가하는 선이 도출되어야 하고, 전쟁 수행 과정에서의 인적 물적 손실보다 더 큰 것이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정당전쟁론은 인간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고 행동할 능력이 있다는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본래 정당전쟁론은 정당화될 수 있는 기준을 제정함으로써 무력의 사용을 최소화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쟁을 허용하는 논리로 악용되거나 폭력 사용의 합리화를 추구하는 전거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문제점

앞에서 제시된 정당전쟁론이 말하는 전쟁 조건들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동소이한데, 몇 가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첫째,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위’라는 문제도 단순하지 않다. 어떤 경우를 합법적인 권위라고 할 수 있는가? 히틀러도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합법적 권위라고 할 수 있고, 6.25를 일으킨 김일성의 정권도 합법적인 권력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전쟁 후의 상태가 전쟁의 원인이 되는 악을 충분히 보상할 때만 정당하다는 것도 이론적일 뿐 정확하게 산정(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란 복잡하고 복합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어떤 예측이나 계산도 정확할 수 없다.

셋째, 전쟁을 일으키거나 전쟁에 참여하는 정당성으로 가장 빈번하게 이용되는 구실이 ‘방어적’이라는 것인데, 이런 구실은 거의 모든 전쟁에서 이용되어 왔다. 김일성도 미군이 남한에서 출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예상되는 위협에 대한 방어적 전쟁이라고 주장했고, 1967년의 이스라엘 비행기가 이집트비행장을 폭격함으로 시작된 ‘6일 전쟁’도 이스라엘은 아랍국가들이 예상되는 공격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방어적 공격이라고 주장한다.

넷째, 키케로가 주장하는 정당 전쟁이론과 기독교권의 정당전쟁론의 한 가지 차이는, 키케로는 국가의 명예와 안전을 중시하고 있으나, 기독교권의 지도자들은 이 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키케로는 국가의 안전과 명예를 중시했으나 기독교지도자들은 국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외국과 전쟁이 발발하면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기독교는 이런 형식의 국가관을 수용할 수 없다.

국가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기구일 뿐, 그것은 신성하지도 않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애국심이라는 것도 거대한 집단 이기주의일 수 있다. 민족이라는 개념의 민족주의도 역사, 언어, 문화 관습을 공유하는 종족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적 이데올로기이지 그것이 윤리적이거나 절대적 가치일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국가의 이익이나 명예 확보가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국가가 불의한 전쟁을 수행하고자 할 때 그리스도인들과 양심적인 시민들은 전쟁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뜻이 신의 뜻?

앞에서 보았듯이 성전론은 첫째, 인간(개인이나 집단)의 뜻을 신의 뜻으로 동일시할 위험이 있다. 자기는 의롭고 상대는 악하다고 간주하고 이의 척결을 신의 뜻으로 동일시한다.

둘째, 신의 이름을 빙자한 전쟁이기 때문에 전쟁 행위에서 발생하는 모든 파괴, 인명 살상을 정당화하고 이를 신을 위한 분투로 간주한다.

셋째, 이런 이념 때문에 전쟁은 잔인하게 수행된다. 성전론은 이것 아니면 저것 흑백논리를 따라 적을 신에 대한 원수로 간주되어 가차 없이 제거하되 극단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극단적인 이슬람 세력이나 아프카니스탄에서 이런 일이 자행되고 있다. 살인 학살 처형 등은 전쟁 행위는 성스러운 수단일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 화평케 하는 자

이상에서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기독교 전통의 3가지 유형의 주장에 대해 검토하였다.

각각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고 문제점을 제시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루살렘에 교회가 설립된 후 첫 300년간은 평화주의 입장을 취했으나 4세기 이후 정당전쟁론으로 대치되었고, 중세 교회에서는 거룩한 전쟁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16세기 이후 다시 평화주의가 제시되기도 했으나 주류의 기독교회는 정당전쟁론 전통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이후에는 전쟁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는 현실주의가 대두되기도 했지만, 정당전쟁론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도 계승되어 가톨릭뿐 아니라 주류 개신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현대 평화사상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즉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를 거쳐, 루터, 칼빈 그리고 라인홀드 니버, 폴 렘지로 이어 오면서 주류 교회의 전쟁론으로 발전되었다. 즉 이들은 악에 대항하고, 약자를 보호하고, 적의 공격에 대한 정당방위로서의 방어적 전쟁은 정당한 전쟁이라는 입장에서 거의 일치하였다.

물론 이런 중세의 큰 흐름 가운데서도 병역 거부나 비폭력, 반전 평화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4세기 투르의 마르틴, 로마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지목된 11세기 카다리파, 12세기 왈도파도 평화주의를 지향했다. 대체적으로 소小종파 기독교 집단이 평화주의를 지향했다.

이탈리아 동북부 지역인 파두아의 마르실리오 평화의 수호자 또한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1324년, ‘Defender of the Peace’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사회 통합 요소는 교회가 아니라 국가라고 보았고, 세속 군주의 기능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보아 전쟁을 반대했다. 그는 또 종교 문제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강제력 사용을 반대하였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에 근거한 경우에’ 국가 권력을 통해 이단을 억제할 수 있다고 하여 이단 박멸을 위한 국가 권력의 무력행사를 정당화한 이론을 반대한 것이다. 마르실리오는 평화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교황우선주의를 반대하고 교회 회의가 교황의 권위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전쟁은 너무 악하고 그 결과가 영속적인 고통이라는 점에서 그대로 둘 수도 없지만, 동시에 복잡한 이해관계와 국제질서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전 쟁을 억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 다. 주어진 상황을 고려하면서 가능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가능한 정의롭게 수행되어 희생과 고통을 줄이고 전쟁이 가능한 속히 끝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을 방지하고 전쟁 억지력을 행사해 야 할 의무가 있다.

성경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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