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칼럼] 5월 광주, 그리고
[논설위원 칼럼] 5월 광주, 그리고
  • 안기석 장로
  • 승인 2023.05.1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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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광장에 모인 세계 각국의 물을 어린이들이 붓자 하나가 된 물이 광주의 빛과 어우러져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다
518민주광장에 모인 세계 각국의 물을 어린이들이 붓자 하나가 된 물이 광주의 빛과 어우러져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다. 가스펠투데이 DB.

5월18일을 앞두고 지난 주말 언론 관련 단체가 마련한 버스를 타고 광주를 다녀왔다.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언론사 재직 시에 취재 겸 다녀오기도 했고 그 후에도 언론인들과 함께 다녀온 일이 있지만 한동안 잊고 지냈다. ‘5.18민주화운동’은 이미 오래전에 전모를 파악했다며 ‘망각의 강’을 건넜는데 다시 ‘기억의 산’으로 올라가게 된 셈이다.

광주로 내려가는 버스에서 2년전에 KBS에서 방영한 ‘5.18특집다큐, 나는 계엄군이었다’는 동영상을 처음으로 보았다.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진압작전에 투입됐다가 41년만에 깊은 침묵을 깬 최병문씨의 표정과 입에 잠시라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오랜 세월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슴 답답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이 겪은 일을 토로하고 싶었는데 수소문 끝에 찾아온 KBS팀에 몇 차례 망설이다가 마침내 증언을 한 것이다.

그는 1980년 5월23일 광주에서 화순으로 향하던 미니버스에 탄 17명의 민간인들을 사살한, 이른바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공수부대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상급자가 확인 사살을 하라는 지시에 따라 미니버스에 올라갔다가 여고생 한 명이 살아있는 것을 보고 데리고 나와 인계했지만 그후 그 여고생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1988년 ‘광주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왔던 유일한 생존자 홍금숙씨가 그 여고생일까 싶어서 KBS팀이 두 사람을 만나게 했지만 그 여고생은 아니었다. 최씨는 실오라기같은 기대가 무너지자 그동안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고 사살될뻔했던 홍씨는 가해자 무리 중 하나였던 최씨를 안아주었다.

그 긴 분노와 침묵의 세월이 지나간 대지 위에서 지금도 ‘공수할아버지’로 불리는 한 계엄군과 지금은 반백의 중년이 된 한 광주 여고생이 이제는 만날 길없는 다른 여고생의 죽음 앞에서 눈물의 만남을 한 것이다.

마침내 도착한 ‘국립5.18민주묘역’은 추모하러 온 젊은 대학생들과 노동자들로 가득 찼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고 송건호 선생 등 언론인들의 묘지를 둘러보고 이른바 구 묘역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광주시가 관리하는 묘지인데 국립5.18민주묘역에 이장하지 못한 시신들이 묻혀 있었다. 동행했던 조성호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이 한 묘에 안내했다. 크리스찬인 조이사장은 한국일보 기자 출신으로 1980년 5월 내내 광주를 떠나지 않고 현장을 취재한 보기 드문 기자였다. 그의 당시 취재 수첩은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보관되어 있다.

조이사장이 안내한 묘비에는 ‘밀양박공병규의묘’라고 씌어 있고 비석 옆에는 앳된 청년의 영정이 놓여 있었다. 고 박병규는 당시 전남도청에 있었던 ‘시민군’을 위해 취사반장을 했는데 그를 도와주던 여고생들 서너명을 몰래 도청 밖으로 빼내고 본인은 다시 도청으로 돌아와 광주진압군의 총격으로 싸늘한 시신이 된 것을 조이사장이 현장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조이사장은 1980년 5월27일 아침, 전남도청안 도경종합상황실 뒤편, 꽃이 모두 떨어진 화단 옆에 복부에 피를 흘린 채 하늘을 보며 숨진 이 청년의 모습이 슬픈 환영이 되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없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해 조이사장이 한 방송사에서 증언을 하는 과정에서 당시 고 박병규씨의 도움으로 생존하게 된 여학생 중의 한 명을 만나게 되었다. 그 여학생은 이제 여고 교장이 되었다고 한다.

묘역을 떠나서 옛 전남도청이 있던 자리 근처에 있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을 찾았다. 전국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기록관 내 기록들을 숨죽이며 찬찬히 보고 있었다. 어린 자녀들과 함께 온 부모들도 꽤 있었다. 특전사 출신이었던 최병문씨는 ‘5.18특집타큐’ 마지막에 자신을 욕해도 좋다며 동료들이 이제는 증언에 나서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저녁에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국립5.18민주묘역을 찾아 아버지 대신 참회했던 노재현씨와 최근 할아버지 대신 참회한 전우원씨를 생각했다. 참회는 대신 할 수 없는데 ‘광주학살’의 책임자였던 두 전직 대통령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러면 이제라도 그들과 함께 한때 영화를 누렸던 누군가가 발포 명령권자를 밝히고 참회해야 그날 광주에서 피 흘린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최씨처럼 진압에 동원되었던 가해자들을 안아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용서와 화해의 시간이 시작될 수만 있다면.

안기석 장로<br>세상의 모든 선물 대표<br>
안기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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