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겔 설교] 가장 낮은 자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
[데겔 설교] 가장 낮은 자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
  • 홍상태 목사
  • 승인 2023.03.10 1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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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셋째 주일
본문: 요한복음 4장 5-42절

* 말씀의 잔치, 교회력에 따른 복음서 설교 2023에서 발췌

신학적 관점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를 무엇인가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으로만 이해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여자가 예수에게 줄 수 있는 것(우물물)이 아니고, 예수만이 그 여자에게 줄 수 있는 것(생명의 물)이라는 사실(7-15)을 그 여자는 깨닫지 못했다. 그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부분적인 진리만을 얘기했다. 예수는 그 여자가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고(16-18) 전체 진리를 밝혔다. 그 여자는 예수가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 다 아는 것을 보고 그가 예언자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가 그 여자의 삶에 관한 진실을 알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19-24), 특별한 종류의 예언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 여자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갈릴리 출신의 이 유대인이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25-26) 물항아리를 우물가에 놔두고 마을로 돌아가 이웃에게 “와서 보라”라고 외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여자는 눈으로 보이는 외양보다 더 깊고 넓은 실체를 분별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8-29)

사마리아 여자처럼, 예수의 제자들도 반어법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예수에게 “랍비여 잡수소서”(31)라고 말했으나 예수가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32)라고 말씀하시자 어리둥절했다. 상식에 근거해서 그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가 어떤 종류의 음식에 대해 말씀하시는지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예수는 벌써 추수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에 대해 증언할 때야 비로소 예수가 어떤 분인지 이해하게 된 것처럼, 제자들도 와서 보라(1:46)고 증언할 때야 비로소 예수가 어떤 분인지 깨닫게 되는가 보다. 반어법(이 본문과 요한복음 전체에 나오는)은 육신이 되신 말씀인(1:14) 예수가 이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1:10) 상황에서, 예수가 어떤 분인지 묘사하기 위해서 저자가 택한 문학적 기법이다. 세상은 자신이 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가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요셉의 아들, 나사렛 출신 예수가 메시아라고 말했을 때, 나다나엘은 온 세상 사람을 대표해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라고 질문했다. 예수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다”라고 말씀했을 때,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바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비판했다.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6:41-42)라는 태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사람들은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만을 본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성령의 도움으로 “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1:29)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다나엘이 “와서 보라”는 빌립의 부름에 응답했을 때 비로소 그는 예수의 참모습을 볼 수 있었다.(1:49-51)

주석적 관점

오늘 본문은 5절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1절에서부터 읽어야 할 것이다. 3절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은 장소를 설정하고 있다. 4절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실 수밖에 없었다”는 지리적으로도 사실이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이 여행의 신학적 중요성을 설정하고 있다. 예수가 수가라는 동네에 이른 것은 그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라는 선언을 성취하는 계시의 새로운 증언자가 되게 한다. 진정으로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계시를 증언하는 데 긴요하다.

우물가의 사마리아여인은 예수의 제안을 수동적으로 받지 않는다. 그녀는 즉시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사회적 장벽과 한계를 인식했지만(9절), 동시에 그녀는 예수의 권위에 대해 자신의 믿음의 조상들에 대한 신앙(12절)으로 도전했다. 니고데모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그녀도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예수님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계시고, 의심하지 않고 예수가 제공하는 것을 요청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15절).

많은 주석가들이 여인의 “죄”와 16-18절에 묘사된 대로 예수의 “용서”에 대해 집착하고 있지만, 본문 어디에서도 그녀가 저지른 죄와 예수의 용서에 대해 단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다. 예수가 그녀의 남편에 대해 질문한 것은 그녀의 지난 결혼 관계에 대해 물은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 질문은 니고데모의 경우와 같이 그녀에게 예수가 누구인지 이해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였고, 그 대화는 성공했다. 그녀는 예수가 선지자임을 알았다(4:19). 더욱이 이 복음서의 죄는 행위와 관련된 도덕적 범주가 아니다. 죄는 불신앙, 즉 예수를 주님과 하나님으로 인정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가 없는 것이다. (중략)

예수는 이 여인에게 우물가에서 하나님을 알게 했고, 그녀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추수를 돕는 자들과 함께(34-38절) 공동증언자가 되게 했다. 그녀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못하지만(4:29에서 헬라어 구문은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함), 그녀가 그녀를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물동이를 뒤에 남겨두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예수와 만나도록 초대한다. 그녀는 예수가 자신에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내도록 인도하는 방식으로 예수께 응답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이 변화되는 것을 본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으로부터 우리 자신이 예수와 만나서 자신이 변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를 또한 변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인이 자신의 동네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예수가 그의 첫 번째 제자들에 하신 “와서 보라”(1:39)는 바로 그 말을 하고 있다. 그녀의 초대와 경험을 나눔으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39절). 이어지는 장면도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예수는 그의 첫 번째 제자들에게 그랬듯이 사마리아사람들과 함께 유하는데 이는 요한복음에서 근본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동사 “유하다”는 헬라어 메노(meno)로 “거하다” “남아있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예수와 함께 거하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이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우리가 아노니”(42절)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요한복음에서 유일하게 “구주”라는 칭호가 사용된 경우이다. 예상치 못한 증언자로서 이 사마리아 동네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3:16 말씀의 성취를 이룬다.

목회적 관점

이 여인의 한 가지 특징은 그녀가 거의 완전히 소외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여성인 그녀는 유대교의 신앙 관습과 지리, 관습적 도덕, 그리고 복음에 대해 낯선 사람이다. 수세기 동안 그녀는 독자들에게 이름 없는 여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일탈했다고 여겨질 만큼 외부인인가? 그녀는 자신의 상태나 행동 때문에 사람들에게 낙인찍히고 그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을까? 우리는 이것을 본문에서 단정할 수 없다. 거기서 더 나아가는 것은 소외된 사람이라는 여성의 상태를 과장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복음서 기자의 눈으로 본 이 여인은 아무도 아니(nobody)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이름조차 알리지 못하고, 성별, 종교적 성향, 사회적 지위, 개인적 습관으로 인해 예수와 그녀의 공동체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이 여성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가능한 한 그녀를 무시할 거라고 기대한다.

“나는 아무도 아니다! 당신은 누구인가?(I’m Nobody! Who Are You?)”라는 시에서 그 역할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을 제외하면,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은 쉽게 입을 수 있는 외투가 아니다. 인기 있는 인물이 된다는 생각은 디킨슨에게 우울한 전망이었지만, 그녀는 예외였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아픔을 피하기 원한다. 그들은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소중히 여겨지고 싶어 한다.

이 본문은 낙인찍기의 굴욕감이나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는 고통을 느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복음이다. 예수께서 이 여자에게서 떠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그녀를 대화에 참여시키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며칠을 그녀의 마을에서 보낸다. 이 여인, 그녀의 공동체, 그들의 복지는 그들이 아무도 아니건 어떻건 상관없이 예수에게 중요하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것은 도전적인 소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교회와 교인들에게 아무도 아닌 사람들(nobodies)이 예수의 눈에는 누군가(someboies)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누가 그런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인가? 바로 우리가 무시하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그들은 교회의 이웃이거나, 문으로 걸어 들어오는 낯선 사람들이거나, 예수를 믿고 믿음의 가정으로 환영받을 잠재적인 집단일 수 있다. 이 본문은 우리가 그리려고 하는 신앙 공동체의 경계가 너무 좁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종종 아무도 아닌 사람들을 제외하려고 하지만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예수는 내부자뿐만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도 제자로 맞이하신다.

예수는 또한 이제 막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사람들을 환영하신다. 그 여인의 두 번째 특징은 새로 믿기 시작했으며 예수와 대화하는 동안 걸음마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녀를 기다려 주신다! 비유를 설명하고 계속 대화하려는 예수의 의지는 니고데모와의 참을성 없는 토론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한 것처럼 이 여인을 조롱하지 않으며, 우뇌 언어에 대하여 좌뇌의 반응을 하는 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부모처럼, 그녀를 양육하고 그녀를 이끈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는 엄격하지만 이 여인에게는 친절하다. (중략)

이 이야기는 여인의 극적인 변화를 이야기한다. 그녀는 소외된 사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증인이 된다. 믿음의 초보자로 시작해서 예수 자신이 보내신 사도가 되어 그분을 대신하여 간증하게 된다. Culpepper, Anatomy of the Fourth Gospel, 137.

그렇게 그녀는 다른 여성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들, 새롭게 믿기 시작한 사람들, 그리고 과거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모델이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 가장 가능성이 낮은 사람들, 심지어 아마도 당신과 나 같은 사람들을 만나서 믿음의 가정으로 환영하신다.

설교적 관점

예수께서 시작한다는 것을 주목하라.

예수께서 우리와 대화하지 않는 데는 항상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번에는 우물곁에 서 있는 사람이 여성이자 사마리아 사람이므로 대화가 불가능한 요건이 두 가지나 된다. 이외에 가까이 하지 않을 몇 가지 이유를 본문에서 추론해서 추가한다면 그것은 [사마리아 여인의]어두운 과거, 좋지 않은 평판, 지지 않으려는 말솜씨 등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와 이야기하기 위해 이러한 규칙들을 깨트렸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설교자이자 목회자로서 우리는 외부자 (outsiders)와 대화하기 위해 규칙을 깨트리는 예수의 태도를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을 반대로 상상해보면 어떨까?

예수께서는 우리와 대화하기 위해 어떤 규칙을 깨트리는가? 그는 어떤 사회적 관습을 무시하고 있는가? 그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과 우리를 구원하는 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어떤 경계선을 넘고 있는가?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또 사회적 현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고 정의된다. 때로 우리는 무엇을 보거나 혹은 보기 원하는 것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두려고 한다. 예수께서는 경계선을 넘어서는 것을 특히 좋아한다. 예수께서는 설교자인 당신과 대화하기 위해 어떤 전통이나 관습 그리고 규례들을 넘어서야만 했는가? 우리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기 전에 그 말을 우리가 직접 느껴야만 한다.

목마른 사람은 바로 예수임을 주목하라.

사마리아를 지나서 걸어가는 일은 멀고도 피곤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마을로 먹을 것을 사러간 동안 우물곁에 앉아있다. 이곳이 예수와 그 여인이 만나는 장소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에 가서 마시는 일은 어렵지 않아야만 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음에 주목하라. 그는 그 여인에게 물을 마시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그녀에게 낯선 사람이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할 기회를 준다. 이 이야기에는 그 구성뿐만 아니라 이 장면에도 아름답고 단순한 무엇인가가 있다. 예수께서는 우물 옆에서 목말라하고 있고 우리는 두레박을 가지고 있다. 뒤따르는 은유적인 대화는 우리가 이것을 정말로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의미가 없다. 사랑으로 시원한 물 한잔을 건네주는 일과 같은 작은 일이 구원에 이르는 여정의 시작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그 낯선 분[예수]을 만날 때까지 그리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때까지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알아보는 순서에 주목하라: 예언자 그 다음에 메시아

치유, 귀신축출, 독심술 등은 항상 우리의 관심을 끄는 귀가 솔깃한 것들이다. 예수께서 묻지도 않고 그 여인의 인생에 관하여 몇 가지 상세한 일들을 말해주자 그녀는 크게 감명을 받는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19절), 아마도 그녀는 메시아임을 알아보기 전에 이 분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 우리 모두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은 보기에도 놀랍고 부인하기 어렵다: 세상의 죄를 안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은 전적으로 다른 분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한다. 이 이야기에서 예언자는 시원한 물이 담겨있는 컵일 수 있는데, 그것을 통해 심원한 존재[메시아]가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영혼과 몸에 물을 공급하는 여정의 첫 단계이다.

말한 것 뿐 만 아니라 말하지 않은 것도 주목하라

이 여인은 자신이 메시아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서 물동이를 놔두고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마을로 달려간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29절)라고 그녀는 외친다. 이 문장은 완성되지 않았음에 주목하라. 그녀는 아마 이렇게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행했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분... 그래도 나를 사랑해준 분을 와서 보십시오!”그녀는 마지막 네 단어 (그래도 나를 사랑해준 분, and loved me anyway!)를 말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행동에서 그리고 기쁨으로 달려간 일에서 그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그 여인이 행했던 모든 일들”은 수 없이 많은 죄의 목록들이고 그 밖에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일이다: 그것은 이웃들이 비판적으로 보았던 것으로 항상 그녀 앞에 있다. 예수께서 그 목록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용서해주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지금까지 들었던 어느 것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롭고 신선한 것이다! 그녀가 이전에 했던 모든 것을 말해주고...그래도 그녀를 사랑했던 그 분이... 그녀의 생명을 구원한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그녀는 하나님을 본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달려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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