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목회] 굿, 몸으로 드리는 예배
[예술과 목회] 굿, 몸으로 드리는 예배
  • 조성진 이사장
  • 승인 2022.11.05 1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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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예배를 무교의 전통의례인 굿과 연결 짓는 생각은 신학생 때부터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연극동아리 종교극회 초기에 회장을 맡아 극회의 방향설정을 해야 했다. ‘극적 감동이 있는 예배’라는 야심찬 캐치프레이즈를 내놓았다. 지도교수인 캐나다 선교사 알리스 어윈 선생님 역시 예배극(Liturgical Drama)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터라 기뻐하며 지지해주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나는 그분에게 더 이상 지도교수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연극교육학 석사까지 한 전문가고, 자원하여 우리와 동고동락하며 여러 작품을 해온 터라 우리의 독립선언은 무척이나 무정한 처사로 보였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제3세계의 신학생으로 한국교회의 문화적 독립을 갈망했다. 어찌해야할지 몰랐지만 단원에게 탈춤이나 굿을 공부해야한다 말했다. 당시 임진택의 ‘마당극이 아닌 마당굿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어느 정도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아직도 숙제로 남은 ‘굿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성당과 굿당

지난 초여름 공연차 이탈리아에 갔다. 밀라노대성당은 광장에서 사진만 찍었고 근처 베르가모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그 내부를 볼 기회가 있었다.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벽이란 벽은 천장을 포함해 모두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채워져 있었다. 난 속으로 외쳤다. ‘굿당이다!’ 미묘한 느낌이었다. 적어도 개신교 전통이 가톨릭의 미사나 건축양식을 우상숭배 운운하며 매도하는 근본주의자들과 궤를 같이하는 차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개신교 예배나 교회 건축양식이 잃어버린 많은 것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유럽 성당의 미적 표현이나 상징의 활용이 우리 굿과 비교해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럽 성당 탐방이 내게 준 선물은 예배와 굿 사이의 문제가 우상숭배 여부가 아니라 미디어의 문제라는 강렬한 느낌이었다. 성당과 굿당은 신을 만나기 위해 오감을 자극하는 모든 걸 동원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굿은 풀이와 놀이의 이중주

굿은 일면 종교적인 행위로 보인다. 그것은 굿이 신화적인 사고를 하는 고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굿의 본질은 공동체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다. 공동체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지도자는 자신의 판단이든 중지를 모으든 간에 일정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 해결책이 공동체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다. 굿은 중지를 모아 하나의 해결책을 마련하거나 그렇게 마련된 해결책에 공동체의 동의를 구하는 오래된 문화다. 고대 제정일치 사회에서는 해결책을 마련하는 정치와 그 해결책에 권위를 부여 하고 공감을 얻어내는 종교적인 영역의 구분이 없었을 것이다. 부족 간의 공정한 물물교환을 위하여 또는 포획한 고래의 공정한 분배를 위하여 하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합의하는 과정을 춤추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는 방식(飮食歌舞)을 통해 이루었으리라. 굿에서는 그 하늘의 뜻을 구하는 과정을 풀이(solution)라 하고, 그 과정에 굿중이 참여하고 공유하는 것을 놀이(presentation)라 한다. 요즘 말로 풀면 의미와 재미의 일치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다는 옛 말은 어부지리를 얻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굿엔 반드시 떡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담고 있는 말이다. 풀이가 메시지라면 떡은 엔터테인먼트요 미디어고, BTS에게는 춤이다. 'Love yourself'라는 메시지는 그들의 춤과 함께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며, 그 결합의 원리가 바로 굿이다.

몸으로 드리는 예배

신도 대부분이 문맹이며 오락거리가 변변치 알았던 중세 사회에서 성당은 온갖 볼거리로 가득한 극장이며, 미사는 마치 공연을 방불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가 일상 언어로 번역된 종교개혁 이후 말씀을 중심으로 한 신학이 큰 흐름을 형성했고, 데카르트 이후 근대 인문학은 이성을 중심으로 한 흐름이 형성되었다. 그 흐름 속에서 몸은 거룩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없었다. 몸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했고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의 덩어리였다. 게다가 산업혁명 이후 몸은 노동 즉 생산의 도구일 뿐이었다. 그랬던 몸이 오늘날 소비의 주체가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멀티미디어를 소비해야 하는 대중의 몸은 생산의 도구에서 소통의 도구로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굿은 우리의 몸을 오감을 가진 소통의 도구로 인식하고, 그 몸을 통해 하늘의 뜻을 만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길의 원형이다. 오늘의 교회는 오랜 시간 영적인 깨달음, 욕망에 대한 통제 그리고 제도에 순응하며 비만의 병증을 앓고 있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가나안에 들지 못하고 있다. 이 새로운 가나안은 누림과 감사 그리고 찬양의 시간이다. 그리하여 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간절히 원한다. 예배와 굿의 악수는 그리로 가는 지름길이다.

조성진 이사장<br>한국영성예술협회<br>마임이스트<br>
조성진 이사장
한국영성예술협회
마임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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