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는 세 가지의 창조가 나온다. 첫째는 ‘태초의 창조’, 즉 원(原) 창조다. 둘째는 ‘계속되는 창조’, 즉 현재의 창조다. 셋째는 ‘새 창조’, 즉 창조의 완성이다. 태초의 창조로 시간이 시작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된다. 모든 창조가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미래의 완성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 성서의 근본적 믿음이다.
이러한 성서의 창조신앙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바울이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가 단지 과거에 이루어진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인 역동적인 과정임을 알았다. 그러기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여기서 바울이 발하는 ‘새 사람’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인간이다.
예전에 경기도 안산에 있는 시화호가 썩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별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한 번 오염된 물은 좀처럼 맑아지지 않았다. 결국 최후로 내린 결단은 시화호 갑문을 열어버리는 것이었다. 큰 바닷물 속으로 섞어버리는 것이었다. 인근 바다가 오염되는 문제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큰 바다의 자정 능력에 의지하는 것만이 그 썩은 물을 정화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난날의 생활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도 약간의 수양과 약간의 선행으로는 정화되지 않는다. 큰 바다가 필요하다.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는 근원적인 힘이 필요하다. 어찌 한 인간만이겠는가.
지금 한반도에서 무언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그런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잊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통일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남북의 진정한 통일은 남한의 삶의 방식을 고스란히 북으로 확장하고 이식하는 것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통일은 둘이 만나 ‘둘 다’ 어떤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나는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정보화까지 이룬 우리나라가 매우 자랑스럽지만, 세계 최고의 자살율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자랑(?)하는 이 체제를 고스란히 북으로 확장하고 이식하는 것이 통일의 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통일은 북도 새로워지고 남도 새로워지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의 교만 가운데 가장 큰 교만은 무엇일까? ‘내가 최고다’라는 교만보다 더 큰 교만은 무엇일까? ‘나는 새로워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일 것이다. ‘나는 이대로 완벽하다’는 자기 착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불신앙은 무엇일까? ‘나는 새로워지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일 것이다. ‘나는 가망이 없다’는 생각일 것이다. 이런 생각은 태초에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혼돈에서 질서를 불러내시며, 오늘도 날마다 세상에 새 생명을 부여하시고,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가장 큰 불신앙일 것이다.
사람의 역사는 반복되는 것 같으나, 성서는 우리 자신과 온 세계가 하나님 안에서 새로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의 창조는 과거에 단 한 번으로 끝난 사건이 아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이고 움직이는 힘이다. 만물을 새롭게 변혁하시는 그 분의 은총 안에서 나 자신과 우리 모두와 한반도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길 간절히 기도한다.
장윤재 교수
현,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교목실장, 대학교회 담임목사
전,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회장
전, 한국교회환경연구소 소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