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소설가 vs. 목회자 (2)
[특별 기고] 소설가 vs. 목회자 (2)
  • 김승호 교수
  • 승인 2022.10.20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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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본 내용은 2022년 8월 29일, 목회윤리연구소가 주관한 “제3회 부교역자와 미래목회 세미나”의 발제 내용 중 일부를 요약한 글이다.

‘3회: 문학상에 대해서’에서, 하루키는 소설가로서의 자기 인식 혹은 자기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자신이 문단에 거리를 둔 것이 아쿠타가와상을 타지 않았던 것(혹은 타지 못했던 것) 때문이 아니라, 상에 별 관심이 없고, 그에 대한 지식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먼저, 자신은 ‘작가가 되자’라고 작정한 일도 없었고, 어쩌다 신인상을 탔고, 문단에 대한 이해도 없었고, 본업(재즈 바 운영)이 따로 있어서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상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처음에 쓴 두 작품에 대해 스스로 그다지 납득하지 못했다는 점을 언급한다. 소설의 기초를 잘 몰라 자신이 가진 힘의 이삽십 퍼센트밖에 쓰지 못했고, 이 정도 작품으로 귀한 상을 타버리면 쓸데없는 짐을 짊어지는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소설가로서의 자기 인식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첫째, 문학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실감이다.

둘째, 그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해주는 독자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실감이다.

셋째, 자신이 염려하는 것은 ‘나 자신이 그 사람들(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해 어떤 작품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루키가 역할 및 능력과 관련하여,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한계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담담하게 자신의 역할을 규정한다.

우리는 여기서 소설가로서 그의 분명한 소명 의식을 볼 수 있다. 자신은 창작과 비평, 이 둘 모두를 수행할 능력이 안 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재능은 ‘창작’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물론 그는 이 둘 모두를 수행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우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자기 능력과 한계에 대한 분명한 자기 인식이 오랜 세월 그가 소설가로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찾는 작품을 생산하는 원동력이라 여겨졌다.

현대인은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데 어떤 개인이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소명과는 무관한 일로 치달을 경우, 스스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상황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비록 소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키는 욕망의 극대화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역할에 초점을 맞춘 삶, 즉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집중하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 자기 역할에 대한 이러한 그의 인식은 오늘날 세속적 욕망의 유혹이 ‘영적 추구’라는 가면으로 둔갑해 존재하는 목회 세계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렇다면, 목회직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현대 사회는 다양성을 특징으로 한다. 목회직 역시 그러하다. 지역교회 목회자는 성도들의 영혼을 돌보며,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부름받았다. 독자를 위해 소설가가 존재하듯, (잠재적 성도인 지역민을 포함하여) 성도를 위해 목사가 존재한다. 소설가는 독자가 소설의 내용(스토리)에 몰입하게 하여, 소설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랑, 저주, 우정, 배신, 시기, 질투, 환대, 용서 등 인간 삶의 다양한 주제를 대면하게 하면서, 독자가 가진 기존의 고정되고 편향된 관점을 해체하고,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도록 돕는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행위는 소설가가 쓴 소설의 스토리, 즉 소설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스토리를 대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허구의 스토리를 접하면서, 독자는 자기 내면을 객관적으로 직면하고, 자기 내면에 숨겨진 가식과 세속적 욕망을 직시하면서 당황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 읽기를 통한 자기 성찰을 통하여, 독자는 인식의 지평을 확장할 뿐 아니라 스스로 삶의 관점과 삶의 방향을 재지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때로 한 편의 소설은 한 편의 위대한 설교나, 성도에 대한 목회자의 헌신적인 목회 돌봄과 다름없는 역할을 한다.

소설가는 ‘이야기의 힘’을 통하여 독자가 스스로를 대면하도록 도와준다. 동시에 소설가는 소설 쓰기를 통하여, 스스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뜨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목회자가 목회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과도 유사하다. 설교를 포함하여 목회 사역의 다양한 측면을 수행하면서, 목회자는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동시에, 이 과정에서 목회자는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및 자신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자기 객관화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소설가의 소설 쓰기가 자신의 내적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 될 수 있듯, 목회자의 목회 사역은 그 자체로 목회자 자신의 내적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리지낼리티, 즉 창의성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하루키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오리지낼리티의 근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내가 쓰는 소설에 오리지낼리티라는 게 있다면 그건 ‘자유로움’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때 ‘소설을 쓰고 싶다’고 지극히 단순하게, 별다른 이유도 없이 불현듯 생각이 나서 처음으로 소설을 썼다. 그래서 별 욕심도 없었고, ‘소설은 이렇게 써야 한다’라는 제약 같은 것도 없었다... 그때 당시의 내 마음의 본모습을 비춰내는 내 나름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 – 단지 그것뿐이다. 그런 솔직한 충동을 몸속에서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책상 앞에 앉아 무턱대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어깨에 힘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겠지요... 오리지낼리티는 바로 그러한 자유로운 마음가짐을, 제약 없는 기쁨을,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생생한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충동이 몰고 온 결과적인 ‘형체’에 다름 아닌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08-9.

여기서 우리는 하루키가 자신에게 있는 오리지낼리티의 근원을 ‘자유로움’이라고 말하는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유로움’의 반대 개념은 ‘구속’이나 ‘얽어맴’ 혹은 ‘통제된 상태’ 등으로 표현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로운 상태에서 오리지낼리티가 피어난다. 통제된 상태에서는 오리지낼리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요즘은 기업체에서도 지속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산출해야 하는 부서에서는 유연근무제를 비롯하여, 자유로운 근무 환경조성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다. 개인의 ‘자유로움’이 보장되는 분위기에서 비로소 창의적인 사고가 가능하며, 거기서 창의성이 담보된 생각이나 결과물을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면,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동체의 목표가 더 중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이라는 국가 공동체의 목표 달성을 위해 일정부분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우리 사회 속에 뿌리내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보다는 집단의 정체성과 획일적 사고가 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다.

이러한 획일적 사고는 한편으로는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여 집단을 하나로 단결하고 힘을 응집하는 순기능으로 작용했다. 반면, 획일적 사고는 ‘우리가 남이가!’로 대변되는 혈연 지연 학연을 특징으로 하는 연고주의를 강화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동질 집단의 과도한 결속력 및 이질집단에 대한 과도한 배타성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를 초래했다. 거주하는 지역과 아파트 평수가 초등학생이 친구를 사귀는 데 중요한 조건이 되어버린 현실은 이러한 한국 사회의 역기능적 부작용을 여실히 보여준다.

문제는 한국교회 역시 이와 유사한 맥락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다.

목회자는 그 직의 특성 상 형식이라는 틀에 매여 살기 쉽다. 목회직 자체가 회중의 리더로서 모델되는 삶을 살도록 요구받는 측면이 있으므로, “내가 회중에게 어떻게 비춰지는가?”라는 문제는 목회자에게 매우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감당해야 할 목회업무의 과부하는 때때로 목회자에게 ‘시간에 제약된 자신’ 혹은 ‘시간의 노예로 전락한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이런 현실은 목회자 스스로 ‘자유로움’과는 거리가 먼 직을 수행하고 있다고 여기게 된다. 실제로 과도하게 시간에 얽매인 환경 가운데 있는 목회자에게 설교와 다양한 사역에서 오리지낼리티가 담보된 결과물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루키의 언급처럼, 시간이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여유와 자유로움은 오리지널한 결과를 도출하는 데 있어서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역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하다가 신학대학으로 사역지를 옮긴 경우이다. 사역지의 이동으로 인해, 발생한 환경의 변화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단연 ‘시간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담임목사는 필요시 언제라도 출동해야 하는 ‘5분대기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대학의 교수는 이런 상황에 직면하는 일이 거의 없다. 이는 잠재적으로 ‘예측 불가능성’을 특징으로 하는 목회 현장과, 어느 정도 ‘예측 가능성’을 특징으로 하는 신학대학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교수는 기본적으로 ‘강의’와 ‘연구업적’ 등을 통해 자신의 노력을 공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강의에는 준비시간이 필요하고, 연구물 역시 연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강의 준비와 연구하는 시간은 공적으로 드러나는 시간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적으로 수행하는 시간으로, 시간 사용에 있어서의 자율성 혹은 자유가 보장된다. 만약 교수에게서 오리지낼리티가 있는 연구 결과물이 나온다면, 그것은 시간 사용에 있어서 어느 정도 ‘자유로움’이 허용되는 대학 사회의 구조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반면, 지역교회 목회자에게는 시간 사용에 있어서의 자유가 상당히 제한된 편이다. 그것은 의무적으로 부과된 사역의 과중함 때문이기도 하고, 잠재적인 예측 불가능성을 특징으로 하는 목회 현장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도 자주 “예수 안에 참된 자유가 있다!”라고 설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예수 안에서의 자유’를 경험하지 못하는 목회자가 있을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실적’이라는 잣대로 목회 능력을 평가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현실이 목회자의 마음을 더욱 옥죄고 있다. 이런 상황에 노출된 목회자에게 오리지낼리티가 담보된 설교와 사역을 기대하기란 어불성설이다.

문제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목회환경이 코로나19 사태에 직면하여 더더욱 심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평가나 비판도 받지 않으려는 목회자의 자세도 특권의식의 발로라고 비판받을 수 있지만,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할 사역의 과중한 부담을 껴안은 채 근근이 목회를 이어가는 목회자의 현실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혹자는 “왜 한국교회 목회자 중에는 유진 피터슨이나 팀 켈러 같은 영성 깊은 목회자가 없을까?”라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교회와 한국교회에서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사역의 분량과 강도를 비교하면, 이런 질문은 우문임을 알 수 있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목회자는 과중한 사역 부담으로 인해 시간 사용에 있어서 ‘자유로움’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오리지널한 설교, 오리지널한 결과물을 생산해 낼 만한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자주 제기되는 목회자의 설교 도용 문제도 사역에 대한 과중한 부담이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적된다.

앞서가는 글로벌기업마다 창의적인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자유로움’을 허용하는 방안을 앞 다투어 추진하고 있다. 노는 것과 즐기는 것, 운동하는 것과 잡담하는 것 등 보다 자유로운 근무 환경을 조성하는 이유는 그런 환경이 개인과 집단의 오리지낼리티를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목회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시간에 쫓기면서 사역하는 목회자는 당장에는 열정의 소유자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 목회자에게는 ‘사역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과 ‘사역을 수행하는 시간’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직접 사역과 무관하게 보이는 여유와 자유로운 시간을 통하여, 보다 창의적인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다.

목회자는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보다는 사역 자체에 매진함으로, 사역의 결과를 통해 자신의 목회적 능력을 인정받으려 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장기간 이런 식의 환경에 노출된 목회자는 창의적 사고가 아니라, 기계적 사고에 익숙해진 인간으로 전락될 수 있다. 지속적인 자아 성찰이 부족한 목회자는 바쁘게 돌아가는 사역과 삶에 짓눌려 예수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경험할 수 없다. 이런 목회자에게 말씀의 대언자로서 혹은 목양하는 치유자로서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행함(Doing)보다 존재(Being)가 중요하다는 말은 목회자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기존의 법칙이나 질서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에게 오리지낼리티를 기대하기란 힘든 일이다. 오리지낼리티에 관한 하루키의 언급은 우리 주변에 비판받는 인물, 특히 목회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함으로 비판받는 인물을 주목하게 한다. 당장에 부정적인 반응을 유발하는 인물이라 해도, 그의 활동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그런 인물에게서 오리지낼리티를 발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목회자가 현장에서 오리지낼리티를 발휘하려면,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으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그런 마음의 소유자에게서는 혁신과 바람직한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무조건 ‘Yes!’로만 대답하는 자가 아니다. 때로는 ‘No!’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목회자가 하는 ‘No!’라는 말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 목회자의 갈등이 있다. 그러나 목회자는 회중으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 그것은 자신이 “목회자로 부름 받았다!”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다. 할 수 있는 한 갈등을 피해야겠지만, 누구든지 모두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다면, 때로는 비판받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비판에 대해 열린 마음에서 비로소 새 시대에 건강한 교회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는 오리지낼리티가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승호 교수 (영남신대, 한국교회언론연구소 연구위원)
김승호 교수
영남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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