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교회를 흔드는 실체, 근본주의를 파헤친다 (5)
정통교회를 흔드는 실체, 근본주의를 파헤친다 (5)
  • 이상학 목사
  • 승인 2022.10.20 1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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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 신앙이 한국 교회 목회에 끼치는 신학적 영향
근본주의는 19세기에 유럽과 미국이 세속화되고, 자유주의 신학이 범람하여 교회를 잠식하는데 위기를 느끼는 데서 시작됐다.
근본주의는 19세기에 유럽과 미국이 세속화되고,
자유주의 신학이 범람하여 교회를 잠식하는데
위기를 느끼는 데서 시작됐다.

지금까지 우리는 네 차례에 걸쳐 기독교 근본주의 신앙의 역사와 흐름, 그리고 한국교회의 목회현장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근본주의는 사회가 세속화되어가고 이에 대한 개방적 반응으로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에서 발흥하는 것에 대항하여 일어난 일종의 반문화운동(counter-cultural movement)이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앙은 세속화라는 충격적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이제까지의 교회와 신앙의 전통적 흐름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인해, 교회를 세상과 극단적으로 분리시키고 결과적으로 세상 속에 파송된 교회의 사명을 후퇴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근본주의 신앙은 다양한 문화적, 정치적 이슈를 등에 업고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 오히려 교회의 정통신앙을 훼손하고, 공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후퇴시키는 형국이다. 근본주의가 갖고 있는 분리주의적, 전투적 성향으로 말미암아 안으로는 기독교의 핵심적 영성인 ‘사랑’의 정신을 훼손하며, 밖으로는 건강한 사회적 신뢰도를 약화시켜 기독교의 가치와 선교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등 그 폐해가 참으로 심각하다.

문제는 이 근본주의가 개신교 신앙의 핵심사조라 할 수 있는 복음주의의 옷을 입고 있기에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순수하게 그리스도를 좇으며 신앙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성도들 중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순수한 믿음이 지나쳐 이 근본주의 신앙에 젖어 생명의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의 율법주의적 신앙패턴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더구나, 이 근본주의는 반공주의나 반동성애 등 휘발성이 강하고 대중의 안목을 끌어당기는 이슈를 선점하여,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문화적, 정치적 전쟁을 선포하면서, 유튜브나 인터넷을 통해 교묘하고도 급속히 확산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신중심적 세계관을 거부하는 공산주의나 반성서적 가치를 주장하는 동성애를 옹호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를 다루는 교회의 태도는 대단히 전략적이고 지혜로워야 한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어라”라는 선교적 대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교회가 심원한 통찰과 함께 상인의 현실적 감각을 같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로 인한 폐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에서는 근본주의 신앙이 한국교회에 끼친 신학적 영향을 냉철하게 살펴보면서, 건강하고, 복음적이며, 선교지향적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을 위한 분별의 지침을 찾고자 한다.

1. 근본주의 신앙의 가치관

근본주의는 19세기에 유럽과 미국이 세속화되고, 자유주의 신학이 범람하여 교회를 잠식하는데 위기를 느끼는 데서 시작되었다. 원래는 동정녀 탄생, 성경의 무오류성, 예수의 육체적 부활과 재림신앙 등 기독교의 본질적인 가치를 지키자는 좋은 취지로 시작되었었다. 그런데, 이것이 반지성적인 사조와 극우정치운동과 연결되면서 변질되기 시작하여 다양한 변모의 과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근본주의 신앙은 몇 가지 신학적 전제를 갖고 있다.

첫째,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주장한다.

성경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하나님이 기록자에게 직접 받아 적게 하셔서 기록된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성경 66권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한 글자도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성경에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기서 오류가 없다는 말은 근본주의가 믿는 것처럼 활자 하나하나에 오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갖고 있는 진리성에 오류가 없다는 뜻이다.

둘째, 근본주의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거나 약화시켜 받아들이려 한다.

이미 알다시피 이 점은 초대교회부터 기승을 부렸던 이단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십자가 사건이 가진 폭넓고 심원한 다층면적 구속사적 이해를 부정하고 대속적 죽음만이 십자가 사건의 유일한 의미라 주장한다. 십자가 사건은 다양한 구속적 의미를 갖고 있다. 대속적 죽음의 의미는 말할 것 없고, 원수로부터 건져낸 속량의 의미, 마귀로부터의 승리 의미, 사랑의 모본으로서의 의미, 인간의 상한 영혼의 치유와 회복의 의미 등 다양하다. 기독교 신학은 대략 10개 이상의 구속 이론 (atonement theory)을 갖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활동을 지나치게 축소하는 결과를 낳는다.

넷째, 종말론에서는 전천년설 세대주의를 주장한다. 천년왕국 전에 예수께서 재림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의 마지막을 암울한 묵시적 종말로 인식한다.

결국, 근본주의는 교리적으로 2천년의 정통기독교 신앙을 충분히 흡수통합하고 있지 않다는 문제를 갖고 있다. 한국개신교인 중에는 부지불식간에 기독교가 마치 1517년에 시작된 것처럼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자신이 교수로 섬겼던 비텐베르크 대학 게시판에 95개조의 반박문을 써서 붙인 날을 기독교의 원년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시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1500년간 기독교는 죽어 있다가 1517년에 부활한 것처럼 인식한다.

또 어떤 이는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신조나 교리가 태어난 날을 기독교의 원년으로 간주한다. 이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창조주요 섭리하시고 구원하시는 구속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인식이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오셔서 교회가 시작된 이래, 교회의 역사는 지난 2천년 동안 이어져 왔다. 부상과 침강, 부흥과 쇠락, 타락과 회복과 갱신을 반복해 왔지만, 기독교회는 지난 2천년 성령의 역사 속에서 서서히 확장되어 왔다.

그렇기에, 정통기독교는 지난 2천 년 간의 신앙의 유산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오늘의 선교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소중하게 간직하고 탐구한다. 내가 서 있는 교파나 교단과 다른 교리를 가졌다 할지라도,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생명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주님으로 믿는 한 포용하고 비판적으로 대화하며 연대해 나간다. 구속사(salvific history)를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2. 근본주의의 성경관 근본주의는 기독교 정통신앙과 분리되어 있다.

무엇보다 성경관에 오류가 있다. 건강한 기독교 신앙의 기준이요 잣대가 되는 성경은 근본주의가 말하듯이 한 글자 한 글자가 하나도 빠짐이 없이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스스로 축자영감설을 부정한다. 행 1:1에 보면,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저자 누가가 말한 “내가 먼저 쓴 글”은 당연히 누가복음을 말한다. 그는 누가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아 적은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만일, 실제로는 받아 적은 것인데, 이렇게 기록했다면 그는 대필자에 불과한 사람이 자기가 썼다고 거짓 과장하는 모양이 된다. 역사가 누가는 복음서를 예수의 행적을 추적하여 자료를 모아 기록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성령의 영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기록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동시에 축자영감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받아 적은 것은 아니다.

정통 기독교가 증거하는 성경의 진리성을 그런 사소한 진실 여부에 맡긴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성경에는 과학적,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대목들이 왕왕 눈에 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복음서의 향유옥합을 부은 사건에 대해, 마태와 마가는 여인이 옥합을 깨어 머리에 부었다고 서술한다. 반면에, 누가는 발로 씻었다고 서술한다. 한 사건에 대한 두 가지 서로 상충되는 이들 증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학적/실증적 진리로 판명하려고 하면 둘 중에 하나는 틀린 진술이 된다.

또한, 잠언 6:6-7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동물학적 발견에 의하면 개미는 인간을 제외하고는 벌과 함께 가장 조직화된 사회를 갖고 있다. 여왕개미, 일개미, 병정개미 등 온갖 조직을 모두 갖고 있다. 이 잣대로 보면, 성경은 과학적으로 오류이다.

성경의 한 글자도 과학적으로 틀린 것이 없다고 말하는 주장은, 현대에서 상식과 건전한 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주장은 성경의 계시성을 방어하려다가 그 진리성 자체까지 부정하게 만들어 버리고 만다.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는데 선교적으로 치명적 주장을 하는 것이 된다.

정통 신앙은 성경의 축자영감설이 아닌 유기적 영감설을 주장한다.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절대 오류가 없다는 말이다. 딤후 3:16-17절은 말씀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글자의 오류성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요, 과학적/실증적 진리성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요, 신앙과 거룩한 행위로 살아감에 오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근본주의 신앙의 성경관은 이를 부정한다. 결과적으로 자기 확신에 입각해 성경의 진리를 옹호하려다가 오히려 성경을 진리로 변증하고 방어하는데 철저히 실패해 버리는 오류를 낳게 된다. 전도와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주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미국에서 1925년 화제가 되었던 일명 ‘스콥스 재판’ (원숭이 재판으로 불린다)이 대표적인 실례이다.

세속화 시대의 한복판에서 교회와 성도는 비둘기처럼 순결하며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복음화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선교의 대사명을 위해, 교회는 항상 무엇을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이며, 무엇을 비판적 대화와 만남을 통해 개방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져야 할 거룩한 십자가이다.

3. 근본주의의 속죄론

2천년 기독교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이해를 포괄하고 있다. 속량설(The Ransom Theory), 승리자 그리스도설 (Christ Victor Theory), 만족설(Satisfaction Theory), 도덕적 모델설 (Moral Example Theory), 형벌교체설 (Penal Substitution Theory), 치유와 회복설 (Healing and Recovery Theory), 마지막 희생양설 (The Last Scapegoat Theory) 등 십자가 죽음의 의미, 즉 속죄론에 대해 실로 다양한 모델을 갖고 있다.

물론, 이 모든 모델은 성경적 근거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구원론에 있어 이 모델들 모두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엡 4:13) 성장해 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는 데에 중요한 공헌을 한다.

그런데 근본주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에서 형벌대속설에만 집착한다. 그래서 다른 속죄론의 의미를 축소 내지 거의 폐기하게 만들었다. “형벌대속설”이란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해 받아야 하는 벌을 예수께서 대신 받으셔서 우리 죄가 용서받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속죄론의 한 모델이다. 지극히 맞는 진리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신앙고백은 이 형벌대속설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십자가 사건이 가진 의미의 전부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마귀에게 포획되어 있던 우리를 하나님이 되찾아 오신 사건이요 (속량설), 예수께서 죄와 죽음과 마귀의 권세를 꺾으시고 승리하신 사건이며 (승리자 그리스도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 우리에게 감화를 끼쳐 그 사랑을 본받게 하는 것이며 (도덕적 감화설), 죄에 찢기고 상한 인간의 심령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 (치유와 회복설).

이 모든 것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한 사람을 건강하게 세워가며, 사회에서 죄와 악과 원수의 권세에 맞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해 가며, 죄의 용서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 내면에 남아있는 온갖 심리적, 영적 질병을 극복하여 전인(全人)으로 세워가게 해준다.

근본주의 신앙은 유독 형벌대속설에만 집착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 결과 어떻게 되는가? 그는 죄의 법정적 용서에 만족하며, 반복해서 짓는 죄에 대해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을 신앙의 초점으로 삼게 된다. 그리고,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영생이라고 단선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물론, 성경은 죄의 용서를 십자가 사건의 중요한 목적으로 선포하지만, 동시에 여기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 이레니우스가 말했듯이, 구원은 한 그리스도인의 총괄갱신(total recapitulation)을 통한 인생과 존재전체의 재창조 과정이며 창조의 온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이런 면에서 근본주의 신앙은 구원의 심오하며, 광대한 스펙트럼을 놓쳐 버리게 만든다. 복음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얼마나 오묘하고 광대하며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할 수 있는지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엡 3:19).

자연히 근본주의 신앙은 하나님 자신을 신실하게 추구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전념하기 보다 다른 비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만든다. 인간은 열망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근본주의의 얄팍하고 단편적인 신앙 이해는 자연히 그리스도인을 도덕주의로 이끌어 가거나 율법주의 신앙으로 자기와 타자를 정죄하게 만든다. 그만큼 생명의 영성이 빈약할 수 밖에 없다.

이런 틈을 타서 근본주의는 그 빈약한 영성에 불을 지펴 특정교리에 대한 헌신을 삼위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하는 교리주의적 독단(dogmatism)에 빠지게 몰아간다. 사실은 신앙이 아니고 주관적 신념인데, 근본주의 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은 이를 분별하지 못하기 일쑤이다. 여기서, 극우적 정치이념과 연결된 배타적이고, 호전적이며, 심지어 전투적이기까지 한 근본주의 영성이 형성되게 되면 이념이 신앙의 자리를 대치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부지불식간에 들어와 있는
누룩과 같은 근본주의 폐해를 직시하고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4. 근본주의의 전투적 영성과 사회윤리

2022년 국민일보가 발표한 한국교회 신뢰도는 18.1%로 나타났다. 작년 21.3%에서 이제 10%대로 하락한 수치이다. 비개신교인 가운데는 8.8%만이 개신교회를 신뢰한다고 응답했다. 한국교회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한국개신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물었을 때에 더욱 명료하게 드러났다. 천주교의 이미지는 ‘헌신적’ ‘희생적’ ‘도덕적’ ‘공감하는’ ‘진정성 있는’ ‘배려하는’ 등이며, 불교는 ‘포용적인’ ‘상생하는’ ‘보수적인’ ‘친근한’ ‘엄숙한’ ‘배려하는’ 등이었다.

반면에, 개신교는 ‘배타적인’ ‘위선적인’ ‘물질적인’ ‘이기적인’ ‘세속적인’ 등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놀랍게도 개신교에 대해서는 건강한 이미지를 떠올린 수 없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설문응답자가 개신교 하면 가장 먼저 ‘배타적’이라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렸다는 것이다.

아마도 일부 기독교인들이 보였던 타종교에 대한 공격성과 호전성, 코로나 극복과정에서 일부 교회가 보인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태도, 사회 대다수 사람들이 가진 정서에 아랑곳하지 않는 반사회적인 행보 (백신을 거부하거나, 코로나 전염병의 엄중한 상황에서 대규모 집회를 하는 등의 태도)가 그동안 개신교에 대해 막연하게 가졌던 배타적 인식을 확대시켰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개신교의 일부 흐름이 가진 이런 배타성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한국개신교는 본래부터 한국사회에서 배타적으로 인식된 종교가 아니었다. 1885년 4월 5일 한국 최초의 본격 개신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내한으로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한국 백성들의 영혼을 깨워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조선사회의 시대적 요구인 개화와 애국계몽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면서 사회전체의 변화에 기여하게 된다. 소위 통전적(hoilstic) 복음선교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초기 선교사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복음사역, 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육계몽사역, 병원을 중심으로 한 구제와 봉사사역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한국 YMCA와 YWCA 등 다양한 기독교시민단체를 설립하여 사회의 공동유익을 추구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이로 인해, 초기 한국개신교는 이미 들어와 있던 천주교의 배타적, 호전적 이미지와 달리 기독교의 본질적 가치인 사랑으로 조선사회의 전체 요구에 건강하게 부응하는 ‘백성친화적 종교’로 인식되게 된다.

3/1만세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중에 16인이 개신교 인사요, 전국에 흩어진 개신교회가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다. 복음이 뿌려지는 시대와 역사의 아픔을 공감하며, 사회의 공동선 (common good)에 적극적으로 아비지하고자 하는 한국초기 개신교의 특성이 낳은 열매였다.

그런데, 1930년대 제 2차 평양대부흥 운동 이후에 한국교회의 기류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장기화되는 일제식민지 통치와 일제의 교회억압에 따라 교회는 염세적 전천년설적 세대주의를 받아들이게 되고,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등 한국선교 초기 선교사들과 달리 세대주의적 근본주의 신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미국 선교사들의 유입과 선교활동이 강화되면서 한국교회 안에 근본주의 신앙은 저변을 확대하게 된다. 그 후, 6.25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한국교회 안에서 근본주의 신앙은 반공주의와 결합하여 결정적으로 지평을 확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현대 미국 근본주의 신앙의 대부격인 칼 매킨타이어(1906-2002)는 한국 기독교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는 미국에서 이미 자유주의 신학, WCC, 빌리 그래함의 신복음주의와 지속적으로 신앙적 전투를 벌이면서 미국교회의 분열에 앞장선 전투적 근본주의 신앙의 대표자였다.

그런데, 한국에 대해서는 친한파를 넘어 거의 집한파(䉅韓派)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교회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집착한다. 그는 자신이 WCC와 신복음주의에 맞서기 위해 세운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의 보수교단의 지도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비록, 후에 이들이 ICCC의 과도한 분리주의와 정치지향적 공격주의에 부담을 느껴 결별하게 되지만 이미 그의 전투적, 공격적 성향은 근본주의 신앙인들에게 깊이 각인된 후였다. 이들은 교회론과 종말론에서도 역사적 개혁주의와 달리 세대주의의 분리주의 종말론과 역사적 전천년설적 종말론에 집착한다.

이를 통해, 교회와 사회를 분리해서 보게 되고,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 들어가야 할 선교공간이라기 보다는 악과 마귀의 세력이 주도하는 전투의 대상으로 보는 세계관이 형성되어 한국교회 안에 정착되기 시작한다.

정리하자면, 근본주의는 현대주의와의 싸움으로 시작되었기에 자연과학, 사회과학, 응용과학, 인문학 등 근대이후 인간지성이 만들어낸 모든 산물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해 있다. 이들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투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라는 인식이 근본주의 안에는 팽배해 있다. 여기에 반공주의에 대한 싸움이 가미되어 근본주의는 기독교 안에서 가장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고, 이 흐름은 한국교회 안의 일부 근본주의 신앙의 배타적인 성향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5. 결론

근본주의 신앙은 한 마디로 잘라 말하기 힘든 성격을 갖고 있다. 탈 역사적이고 초월적인 것 같으면서도 반공주의와 애국주의, 반동성애 등 특정 정치이념과 문화운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전투하는 역사몰입적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 성경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주장하면서도 성경 전체가 아닌 특정 부분에만 함몰하는 비성경적 태도를 갖고 있다. 아주 개인주의적이면서도 대단히 집단적 응집력이 강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근본주의 신앙은 그것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 자신도 자신이 근본주의 신앙을 갖고 있다고 인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영성 형성(spiritual formation)의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 자신이 복음의 본류인 복음주의와 종교개혁 신앙, 그리고 2천년 전통의 정통기독교 신앙과 관련이 없는 근본주의 신앙을 갖고 있는지의 유무는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다.

첫째, 특정한 신앙, 신학, 정치이념, 문화운동에 대해 비판을 넘어 호전적, 전투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이는 근본주의 신앙의 발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종교개혁자 루터)의 토대 위에 세워진다. 요 16:35절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의 영성이 바른 기독교적 영성에 기반한 신앙인지의 여부는 그가 사랑의 영성을 견지하며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근본주의 신앙은 진리의 사수를 표방하면서 끊임없는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며, 상대방에 대한 정죄와 전투적 영성을 기독교 신앙에 대한 충성이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무신론적 공산주의 혹은 무신론적 사회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또한, 창조신앙에 반하는 동성애를 찬성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흐름에 대해 적개심과 전투적 영성으로 다가서느냐 아니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인내심을 갖고 사랑의 영성으로 접근하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근본주의는 사람 안에 분노, 두려움, 불안, 의구심을 넣어 그것을 따르는 사람을 움직이려 한다는 면에서 우리가 깨어 주의해야 영적 흐름이다.

둘째, 앞서 말했듯이 근본주의는 현대가 낳은 과학적, 이성적 산물을 부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현대신학은 말할 것 없고, 현대의 물리학 등 자연과학, 의학 등의 응용과학뿐 아니라 심리학, 철학 등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적 산물을 부정한다. 근본주의 자체가 현대주의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근본주의 신앙은 부지불식간에 배타주의와 독선주의로 흘러가기 쉽다. 하지만, 이는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근본에서부터 부정하는 태도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현대의 급격한 세속주의의 흐름 속에서도 역사를 이끌어 가시며, 세속역사 안에서, 세속역사를 통해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심으로 당신의 나라를 확장해 가시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가 낳은 다양한 이성적, 합리적 산물들은 구원받은 이성으로 여과하여 수렴해야 할 것이지 무조건 저항하거나 거부할 일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근본주의 신앙은 지성적, 영성적으로 게으르다 할 수 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구원받은 이성으로 여과될 때,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은 없다 (딤전 4:4-5). 인문학, 사회과학, 철학, 과학 등 모든 것은 합력하여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데 사용될 수 있다 (롬 8:28).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요 자신감이다! 그런데, 근본주의는 종교개혁 전통의 하나인 특정 신학흐름을 절대화하여 나머지 정통신학들을 전면 부정한다.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셋째, 근본주의는 성서중심적인 것 같지만 성경 66권 전체의 신학을 통합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은 이념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고루 간직하고 있다. 자유, 정직, 성실, 근면, 경건, 애국 등 보수의 가치와 개방성, 유연성, 평등, 복지 등 진보의 가치를 포괄하고 있다. 그런데, 근본주의는 반공주의 등 특정 이념에 함몰하여, 보편적 성서중심 신앙을 벗어나 있다. 만일, 성경이 가진 폭넓은 스펙트럼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절대로 특정 정치 이념을 절대화하여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심지어 마귀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경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존중한다면 자연히 대화와 타협, 포용과 개방이 가능한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는 부지불식간에 들어와 있는 누룩과 같은 근본주의 폐해를 직시하고, 신학과 신앙 안에서 이 근본주의 영성을 극복하는 노력이 적극적으로 필요한 때이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의 선교지형은 확대될 것이며, 민족복음화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더욱 가속화될 수 있을 것이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딤전 1:4-7)

이상학 목사새문안교회
이상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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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현 2022-10-20 17:37:03
단숨에 다 읽었어요. 근본주의 신학에 함몰된 일부 극우 집단으로 인해 선교의 공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 감사드려요~ !!!

김혜정 2022-10-20 17:25:10
우리 한국교회 안에는 많은 조건들이(정치적상황, 세계 유일의 분단국 등) 근본주의 신앙에 빠질 수 있는 환경이라는 걸 깨달게 됩니다..목사님 글을 통해 정말 깨어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근본주의 신앙이 내 안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를 수 있다는 울림을 주셨습니다. 흐리다 하여도 그것이 근본주의 신앙의 모습이 있다면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사회 앞에서 자정할 수 있는 그런 한국교회가 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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