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목회] 차와 성찬
[예술과 목회] 차와 성찬
  • 이상목 교수
  • 승인 2022.10.06 1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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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이른 봄 코비드-19 감염증의 유행으로 학교도 직장도 문을 닫고 재택수업, 재택근무가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삶의 소통 창구가 모든 끊어진 듯하여 고립의 어둠 속에 빠져드는 것 같았던 그때, 문득 내 눈에 개완(뚜껑이 있는 중국 찻잔)과 차가 들어왔다. 개완의 투박한 듯한 모양이 주는 멋을 발견했고, 그것으로 우려 마시는 차 맛을 알게 되었다. 이는 내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경험이었다. 이내 차를 우려 마시는 것은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다양한 향미와 색을 선사하는 차는 유행병 시대를 이겨내는 삶의 탈출구가 되었다. 선반에는 차와 차 도구가 하나 둘 늘어갔고, 매일 저녁 가족과 함께 이런저런 차들을 음미하였다.

차를 마시는 경험이 쌓일수록 나에게 한 가지 소망이 생겼다. 차의 다채롭고 미묘한 맛, 향, 색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행복하고 그리운 기억으로 남기 원하는 바람이었다. 바쁜 삶을 살다 보니 나와 아내는 나이 들었고 아이들은 훌쩍 자라 머지않아 둥지를 떠날 채비를 하는 듯했다.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면, 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 자문해 보았다. 세월이 흐르면 나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데, 내 두 아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무엇을 통해 기억할지 궁금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아버지를 기억하고 기념할 것이 없을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나는 차 한 잔 한잔을 나누며, 그 향과 맛이, 손에 올려놓았던 개완과 찻잔의 촉감이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남기를 바랐다. 찻 자리를 반복된 삶의 의례로 삼아 우리가 함께 꺼내 볼 수 있는 행복하고 그리운 기억을 남기길 원했다. 햇수로 3년이 되도록 그 의례를 계속하지만, 각자의 삶이 바빠 찻 자리가 좀 뜸해진 요즘, 엊그제 늦은 시각 공부를 마치고 집에 온 막내아들이 “아빠, 차 마시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밤은 깊었지만, 우롱차를 우려 마시며, 막내의 기억 속에 아빠가 만들어 준 차가 자리하는 듯하여 반갑고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이천여 년 전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포도주와 빵을 나누었던 예수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제자들이 이제 곧 잡혀갈 스승을 기억하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포도주와 빵은 1세기 지중해 문화권에서 가장 기본적인 식품이었다. 부유한 사람들은 다양한 진미를 즐겼겠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포도주와 빵만으로도 식탁교제를 나누었다. 예수의 마지막 만찬은 유월절 식사이니 빵과 포도주 외에도 다른 음식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가난한 이들도 함께 나눌 수 있었던 가장 소박한 음식을 통해 제자들에게 당부하였다. 자기 가르침을, 자기 죽음을 잊지 않기를. 제자들이 모일 때마다 이 간단한 음식으로 스승 예수를 기억하고 제자로서 함께 삶을 나누기를.

이러한 예수의 바람은 기실 마지막 만찬을 통해서 급하게 제자들에게 심긴 것이 아니다. 예수는 공생애 동안 이곳저곳을 방문하여 ‘죄인’이나 ‘의인’을 구별하지 않고 함께 먹고 마셨다. 제자들은 그러한 스승 옆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가르침을 들었고 기적을 체험하였다. 그러한 자리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식품은 포도주와 빵이었을 것이다.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함께 마셨던 포도주의 맛과 빵의 식감, 거나해진 기분과 포만감이 감돌았던 배, 아멘이라고 화답할 수밖에 없었던 스승의 교훈과 치유의 기적, 이것들은 모두 포도주와 빵의 기억 속에 간직되었다.

올해 여름 체코 타보르에 있는 후스 박물관을 방문하던 중 “utraquist”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뜻을 찾아보니 ‘양종 성체 주의자’ 또는 ‘이종 성체 주의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었다. 얀 후스와 그를 따르던 크리스천들은 성찬에서 신자들에게 빵만 나누어 주던 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포도주와 빵을 모두 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의 주장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성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신앙의 발로였다. 이러한 요구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나누었던 포도주와 빵의 기억에 동참하려는 소망을 담은 요구이기도 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기억은 문자인 성경을 통해서 전수되기도 하지만, 성찬을 통해서도 전해진다. 아니, 성찬은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한 삶을 후대에 다시 체현하는 자리가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대부분 작은 떡 한 조각과 한 모금도 되지 않는 포도 주스로 성찬을 나눈다. 오래전 팔레스타인 이곳저곳을 떠돌며 제자들과 함께, ‘죄인들’과 어울려 포도주와 빵을 나누었던 예수의 기억은 그 성찬에 남아있을까? 마지막 만찬이 담고 있는 풍성한 삶의 기억, 오감으로 느꼈던 예수의 삶에 관한 기억이 그 성찬을 통해 이어지는가? 오늘도 차 한 잔을 음미하며 예수의 기억을 되새겨 본다.

이상목 교수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연구교수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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