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 동네 클리닉에서 임시의사로 일하는 제니는 능력 있고 야무진 여성이다. 환자와 소통을 중시하지만, 환자에게 휘둘리거나 감성에 치우치지도 않는다. 의사라는 직업이 갖는 이율배반적 특징이다. 어느 날 신경질적으로 발작하는 환자를 치료하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수련의(Intern) 줄리앙을 진료가 끝난 후 나무란다. 약간의 감정적 소비가 있던 제니는 이때 불현듯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반응하려는 줄리앙을 만류하며, 진료 시간이 지나 찾아온 환자까지 돌봐야 할 의무가 없음을 강조한다.
다음날, 제니가 거절했던 그 사람이 이름 모를 어떤 소녀였으며, 인근에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제니는 별다른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양심의 울림이 발생한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버려진 듯 인근 묘지에 매장될 예정이라는 말을 들은 제니는 그 소녀가 누구이며, 최소한 이름이라도 알아야 후에 그의 가족들이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소녀의 행적을 추적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여러 관련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제니를 거부하며 차갑게 대한다. 과연 제니는 그 소녀의 연고와 사고 원인을 밝혀낼 수 있을까?
영화는 마치 형사가 범인을 추리하며 찾는 방식을 취하만, 실지로 제니는 형사도 탐정도 아닌 일개 의사일 뿐이다. 수사에 대한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한 의사가 죽은 소녀의 이름과 사건의 경위를 알기 위해 탐문하며 찾아다니는 행위는 주변인들에게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관련된 자들에게 위험의 요소로 다가온다. 이제 제니는 자신의 신변의 위험마저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하고 헌신적으로 찾는다. 왜일까? 자신이 문을 열어주었다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한 여인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과 죄책감이다. 더하여, 영화적 설정이겠지만 제니가 가진 ‘의사’라는 직업적 윤리의식도 한몫했으리라!
하지만 그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하다. 가장 중요한 게 남았다. 그건 ‘휴머니티’라는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감정과 의지에의 호소이며, 인류 생존을 위한 원초적 본능에의 청구이다. ‘이름 모를 소녀(unknown girl)’는 아무도 관심 없고, 관심을 가지려 하지도 않는 한 인간존재에 불과하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 소녀는 불법체류자이고 살기 위해 법을 어기는 일도 감행했던 10대 소녀이다. 욕망에 가득 찬 백인 사회에 희생제물로 찢기고 상한, 도망치고자 했으나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던 가련한 소녀였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이고 세상에 존재할 사명을 띠고 이 땅에 발 디디고 사는 사람이다. 그건 인종이나 종교, 학벌, 지위, 성별, 나이, 사회적 계급과 전혀 상관이 없다. 단지 인간으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의사’로 정의하곤 하셨다. 그런데 그 ‘의사’는 단지 육신의 질병만 고치는 게 아니다. 마음과 영혼, 사회적 관계까지 포함한 전인적 치유이다. 제니는 육신을 치료하는 의사지만, 영화 속에서 그는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진심 어린 걱정을 한다. 그리고 이름 모를 한 소녀를 위해 끝까지 이름을 찾아주려 애쓴다. 이름이 곧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전도유망한 한 백인 의사가 이름 모를 소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습이 매우 낯설지만, 이는 반대로 생각하면 역설이고 보편성이다. 결코 특별한 행동도 특별한 대우도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은 ‘의사’가 계급으로 여겨지는 시대이다. 능력이 최고의 가치로 평가받는 사회이다(Meritocracy). 하지만, 세상은 어차피 혼자서 살 수 없다.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배와 피지배, 우등과 열등으로 나누기보다는, 각 존재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며 도우며 사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정의롭다. 그게 사회며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는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