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정통교회를 흔드는 실체, 근본주의를 파헤친다 (4)
[특별기획] 정통교회를 흔드는 실체, 근본주의를 파헤친다 (4)
  • 김주용 목사
  • 승인 2022.09.26 17: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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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가 목회 현장에 끼치는 영향과 사례

근본주의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했던 이전 세 편의 글은 한국교회 초기부터 뿌리 깊게 자리를 잡았던 근본주의 신학을 제대로 파악하고 인식하게 했다.

전체적으로 요약해 보면, 근본주의 신학은 성경 무오설을 기반으로 하는 비상식적 축자영감설에 빠져 있고, 지금까지 이어온 성령을 통한 교회의 역사를 부정한다.

또한, 세상의 학문에 대해서 흑백논리로 판단하고, 때론 근거 없이 무시한다. 성경의 무오설의 딜레마에 빠진 근본주의의 신학은 ‘창조과학’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창조과학을 수용하지 않으며 모두 진화론을 지지하는 세력인 것처럼 선동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시대에 맞지 않는 주입식 기독교교육에 폐해를 보여주고, 종교적 재판관의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여 교만한 정죄를 일삼으며, 마지막으로 근본주의 신학은 반선교적 교리를 보여주고, 끝내는 자기들이 재단한 편향된 하나님의 속성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인식한다.

결과적으로는 만물의 하나님에 대한 신적인 인식을 부정하는 것으로 하나님도 믿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근본주의 신학에 의해 교회 현장에 나타나는 영향과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이에 대해 신학과 목회, 선교의 아픔과 고통을 7가지로 파악하고, 차후의 한국교회의 방향을 찾아보고자 한다.

첫째, 근본주의 신앙은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성경공부를 싸움터로 만든다.

교회 안에 성경공부는 단순히 교리를 전달하고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통해 인간의 삶과 하나님의 뜻을 연결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경전에서 찾는 과정은 철저한 신학적 작업이 필요하겠지만, 그 접근은 절대로 닫힌 관점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서의 관점도 네 가지의 눈이 있었듯이, 성경을 보는 관점도 다양함을 인정하면서 성경공부에 임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모든 학습자는 또 다른 성경의 해석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학습자는 배우고 이해하며 새로운 지식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의 신학을 근본주의적 신학의 잣대로 점검하고 재단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성경공부반에 들어온다.

예를 든다면, 근본주의의 신앙에 묶여 있는 성경공부 학습자는 성경의 절대 무오 입장에서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한다. 고전 14장 33-40절에서 성경은 교회에서 여성은 잠잠하라고 한다. 근본주의의 신앙을 가진 교인은 이와 같은 성경의 문자적 표현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한 교회에서 여성 부교역자가 성경공부반을 개설했는데, 항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어떻게 여성이 성경공부를 가르칠 수 있느냐, 성경은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여성이 하나님 말씀으로 떠들 수 있느냐 면서,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이런 실례가 여전히 한국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또한 근본주의 기독교는 세대주의 종말론 또는 유사 시한부종말론과 연결되어 있어, 요한계시록을 비롯해 일부 성경에 대한 해석이 정통 신학에서 벗어나 있다. 일부에서는 베리칩이 짐승의 수 666이니 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백 투 예루살렘’을 주장하며 이스라엘의 복구와 회복이 이뤄지고 성경의 때가 차게 되면 예수의 재림이 온다는 주장을 그대로 기존 교회에 스며들게 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진 근본주의 성경공부 학습자는 그러한 관점으로 계속해서 정통 신학의 성경공부 지도자를 공격하고, 그들의 주장에 관심을 가지는 성도들과 그룹을 만들어 교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동을 일삼는다.

따라서 근본주의의 신앙에 빠진 성도들이 성경공부에 열린 마음으로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성경관에 대한 회심은 반드시 필요하고, 교회는 성경에 대해서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바른 성경관이 교회 전반에 나타날 수 있도록 장기적인 학습이 이뤄지도록 해야 하고, 근본주의적 성경관이 얼마나 신앙에 위험한지를 인지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근본주의 신앙은 교회 역사를 부정하고자 한다.

역사는 절대로 진공상태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늘의 역사는 어제라는 과거의 역사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대 교회의 모습도 이전 과거 역사 속에 있는 교회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 곧 신(新)신학이라고 불렀던 신학의 흐름 또한 세계 곳곳이 수많은 혁명적 변화 속에서 나왔던 교회 역사적 산물이며,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부정하고 싶어 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역사도 현재의 교회의 한 뿌리임은 분명하다.

또한, 그들은 세계교회협의회(이하 WCC)를 용공으로 몰기도 하고 최근에는 동성애를 적극 지지하는 집단으로 여기며 WCC에 속한 교단들이나 교회들을 근거 없이 비난하기도 한다. 상대방이 왜 그런 주장을 하며 그런 내용의 신학을 가지고 있는지, 테이블에 앉아 대화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고, 무조건 제 2차 자료와 근본주의에 빠져 있는 소수 목회자들의 발언들에 매몰되어 무조건 상대방을 악마로 만들어 버린다.

예를 든다면, 성경공부를 이끄는 목회자 또는 교사가 천주교나 WCC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가 있을 수 있다는 짧은 발언만 해도 근본주의 신앙의 학습자는 그 다음 날 천주교와 WCC가 악마의 집단이라는 왜곡, 비방하는 페이크 뉴스를 성경공부 동료들에게 보내고, 목회자나 교사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TV 방송설교나 유튜브 설교에서 어느 목사가 천주교와 WCC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는 언급만 있어도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비방과 욕설의 댓글을 단다.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성경이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도 인간의 구전과 언어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수많은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문화화 되고 상황화되는 과정을 통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인데, 근본주의의 신앙인들은 그 모든 중간의 단계를 완전히 무시한다.

그러나 근본주의의 신앙도 교회 역사에 한 부분이다. 제거할 수 없는 불편한 신앙의 동지들이라는 것이다. 완전한 영적 화학결합이 어렵다면, 정반합의 역사 발전에 따라 근본주의의 신앙과의 반목과 충돌 속에서 새로운 신학과 신앙을 모색하는 것도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제 3의 길일 것이다.

미국 교회가 80~90년까지 근본주의에 빠진 교회들에 의해 급격한 쇠퇴를 경험해 가면서, 그 침체의 길 가운데 반성과 변화를 모색하던 기성교단을 벗어난 신흥교단의 복음주의 계열 교회들이 부흥을 이루면서 지금까지 새로운 미국교회의 부흥을 이끌 수 있는 사실은 근본주의 기독교가 불편한 것이 사실이지만 필요한 상생의 길을 없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셋째,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피 속에 흐르는 창조과학은 성경과 과학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다.

먼저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가(假)과학 또는 유사과학이라고 한다. 창조과학을 기초로 하여 연구한 논문이 정통한 과학 학술지에 기고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끔 학술지의 인용이라고 말하는 창조과학 내용이 있다. 정통한 과학 분야 학술지에 기고될 수 없으니, 그들은 자기들만의 학술지(Answers Research Journal)를 만들었다.

한 생물학자는 나름 객관적인 창조과학자라고 하는 양승훈 박사조차 창조과학 관련 논문이 어떤 정통 학술지에도 기고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처럼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창조과학은 신학도 아니다. 성경을 창조과학적인 시각으로 해석하고 분석하여 나름 신학적 토대를 보여주려고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것은 자기들의 가진 얄팍한 지식으로 성경을 누더기로 만들어 놓아 버린 것에 불과하다. 바다가 평평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성경(계 7:1)을 근거로 삼으면서 성경을 세상의 비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기본적인 과학과 상식조차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성경적 내용을 끼워 맞추기 식으로 해석하고, 새로운 이론에 대해서 대화적 접근을 하거나 자기반성의 계기로 삼는 학문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 창조과학을 기독교 신학이라고 하기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것을 기본적인 신학으로 삼는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허무맹랑한 세계 속에서 교회와 신도를 나락으로 이끌고 있어 현장에 있는 교회들은 매우 예의 주시하며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어느 목사는 블로그에서 창조과학의 근본주의 신앙에 빠진 성도들이 비상식적 사고를 가지고 성경을 비롯해서 세상까지 해석하고 판단하여, 그러한 자기 잘못된 신앙을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강요하고 주입시켜 학부형들 사이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우주의 나이가 창조과학의 주장대로, 약 6000년이라고 자기 스스로 믿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강요하고 세뇌시키려고 하는 행위는 결코 바르지 않다. 그러나 창조과학이라는 매트릭스에 빠져 있는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그 괴이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한국교회 현장에서 순수과학 계통의 직업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창조과학의 암울한 그림자가 교회 곳곳에 드리운 교회에서 세속적 학문 입장을 유지하며 신앙을 지켜내려고 하는 자들은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진화론을 믿는 악마화의 대상이고,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하든 그들을 창조과학으로 전도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창조과학을 동의하지 않는 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성도들은 그들 때문에 더 이상 교회에 발을 붙이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고 있다.

선교지는 먼 곳에 있지 않다. 가까운 과학의 실험실에서 예수가 구원자임을 믿고 세상에서 치열하게 복음을 고수하며 신앙을 지키는 과학자들을 향한 선교가 저 멀리 있는 해외 선교지보다 훨씬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넷째, 근본주의의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주장과 뜻을 반대하는 편은 무조건 악마화 시키려고 한다.

근본주의 신학의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는 모든 관점에 흑백논리와 이분론적인 사고로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에 흑백논리의 잣대가 자리 잡고 있으면, 상황에 따른 윤리적 판단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윤리는 어쩌면 사치일 수 있다.

시대와 역사, 더불어 그 당시에 정치와 경제, 문화와 사회의 현상들을 종합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이슈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그러나 성경과 신학에 근거한 윤리적 판단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근본주의의 신학은 율법과 명령만이 내려질 뿐이다. 그러나 그 율법과 명령은 자신들을 반대하는 상대를 향한 정죄와 악마화를 시도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앞에서 논의했던 것처럼, 창조과학에 서 있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은 자신의 입장을 세속적 학문과 지식으로 비판하면 비판자의 주장과 내용의 취지는 살피지 않은 채, 자신들의 창조과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진화론자’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1950-60년 WCC를 긍정적으로 수용한다는 이유로 교회와 목회자들을 용공세력처럼 묘사했던 근본주의자들은 지금도 동일한 프레임으로 곳곳의 교회들과 목회자들을 공격하고 악마화 시킨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기적과 이적에 대한 기록에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여 단순히 한 쪽의 해석이 아닌 많은 가능성을 담보하는 성경적 접근을 보여주는 주장을 하는 신학자에게는 ‘자유주의 신학자’ 또는 ‘이단’이라는 굴레를 씌우려는 시도가 계속된다. 한국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를 중시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자유는 자기들의 책임 없는 주장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방종일 뿐, 근본주의 신학에 반하는 객관적인 주장이나 충분히 검증된 신학적 논문에 대해서 대화의 견지를 벗어나 비난만을 일삼는 모습에서, 그들이 이웃과 타인, 세상에는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독재자 오류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이미 모순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근본주의 신학은 자기들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상대방을 극단적인 배타주의로 갈라치기 하고, 자기들은 선(善)이고 자기를 반대하는 이들은 악(惡)이라고 생각을 하여 사단의 대상이 된 상대방은 죽이고 없애려고 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고 있다. 근본주의 신학의 비판자들은 악마와 사단이기 때문에 영적 전쟁 가운데 싸워 쳐 부셔야 할 존재라 여긴다. 그러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이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건강한 연합과 대화는 어려울 것이다.

다섯째, 근본주의 기독교는 만남과 대화의 기독교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독교교육은 마틴부버의 ‘관계철학’과 에밀 부르너의 ‘만남의 신학’을 통해 헬라의 이분론적인 세계관을 뛰어 넘어 통합과 관계 중심으로 나아가는 교육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만남과 통합, 관계를 교육의 미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증거는 1925년 미국 테네시주에 있었던 스콥스 재판이다.

존 스콥스는 공립학교 내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한 테네시주의 법을 어기고 학교에서 진화론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게 된 사건으로 미국 기독교내 근본주의자들의 교육적 정신이 세상에 여과 없이 드러났던 사건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신봉하는 주장과 내용만을 관철하려고 한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과 만나 대화하며, 또 다른 길을 찾는 방식의 교육을 그들은 전혀 원하지 않는다. 무조건 나와 다르다면 싸우고 부정하려고 한다.

최근 각 교회는 동성애 문제와 차별금지법 때문에 홍역을 치르고 있다. 교회는 성경적 가족에 대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깊은 토론과 논의를 가운데 하나님 뜻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존재한다. 동성애 문제와 차별금지법의 문제에 대해서 결코 하나의 답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 결혼관과 가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좋으나, 그에 대한 접근과 해석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이에 대해서 충분한 학습과 교육의 방법으로 긴 여정 가운데 교회가 무엇은 끝까지 고수하고 지키며 무엇은 관용과 포용으로 끌어안아야 하는지를 교회 안팎에 충분히 설득해 가는 과정이 필요하고, 조금씩 다른 서로의 견해와 판단을 조율하고 합의하기 위해서 만나고 대화하며 통합해 가는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데,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어떤 설명이나 과정이 없다. 무조건 안 되고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한다면,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근거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제시하여야 한다. 그런 모습 없이 무조건식의 ‘반대’와 ‘부정’을 외치는 근본주의는 말이 통하지 않는 그룹으로 인식될 것이고, 그것은 곧 반사회적 존재로 점점 세상으로부터 관심 밖에 대상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선교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기독교의 근본주의적 성향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세상의 외딴섬이 되어 갈 것이다. 소통과 공감을 이루지 못하는 교회는 절대로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없다. 계속적인 주일학교 위기의 경고음이 울려 퍼지는 시대 속에서 근본주의에 발목이 잡히는 한국교회는 단호한 결정이 필요하다. 끊어내지 않으며, 기성세대보다 훨씬 뛰어난 문명적 혜택과 문화적 진보를 이루는 교회학교 자녀들을 세상으로 다 빠져 나갈 것이다.

여섯째, 근본주의 기독교인은 예배에서도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한다.

그들은 예배 가운데 예배자 개인이 자신의 감정과 정신을 신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예배 중 영적 경험을 이끄는 미학적 장치들을 의심하고 부정한다. 그래서 과거 근본주의자들은 예배 중 박수를 치는 것을 비롯해, 찬송가공회에서 정한 찬송가 외에 부르는 소위 복음성가까지도 사단의 음악이라고 했다.

근본주의자들이 교회 당회에 다수를 차지하던 몇 십 년 전 교회는 찬양 중 악기 하나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예배 때 본당에서 기타 치는 3년, 드럼 치는데 5년, 주일 본 예배에서 복음성가를 부르는데 10년이 걸렸다고 말하면서, 무슨 큰 업적이라도 이룬 것처럼 각 교회의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유치한지 모른다. 그런 과정이 더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런 결정을 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이유가 서구 교회를 동경하는 그들이 서구 교회들의 열린 예배에서 예배 중 복음성가를 부르고 찬양과 악기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은 사실 근본주의자로서 철저한 신앙적 원칙과 기본을 가지고 예배를 지키는 것이 아닌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예배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정한 새로운 시대의 율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예배의 주관자라는 주장은 그들의 종교적 교만함을 가리는 겉옷에 불과하다.

그들은 스스로 예배의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의 감정과 의식, 미학적 상징이나 행위가 예배에 방해가 된다고 하면서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수용하거나 불용하거나, 마음대로 한다. 중요한 것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교회의 헤게모니를 잡느냐 그렇지 않는가에 따라 달렸을 뿐이다.

초대교회 때의 예배와 중세 가톨릭교회의 예배, 그리고 1900년대의 예배와 2022년의 예배는 다르다. 예배의 정신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만,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처럼 예배의 형식과 절차에 대한 극단적 원칙 고수 입장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은 이미 일관성을 상실하고 입장의 논리조차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예배의 주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안식일의 율법은 인자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막2:27-28)

일곱째, 근본주의자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하나님조차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아파트 재개발 단지에 알박기를 했던 철거 대상이었던 교회는 불법 점거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요구한 보상금을 받게 되어 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더욱 부정적 여론을 만든 것은 큰 보상금을 지키기 위해 알박기를 한 교회의 목사는 부목사와 장로, 성도를 믿지 못한다고 선언하면서,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 집단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확인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 곧 성도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가는 절차와 과정 가운데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이단이라고도 말하고 악마의 집단이라고까지 비난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도 ‘공동합의성(Synodality)’을 바탕으로 성도들과 중간 사제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최종 의사를 결정하고자 한다.

그런데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도 독재를 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며 교회 안에서 절대 권력을 남용한다. 물론 그들도 겉보기의 절차는 따른다. 그러나 교회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민주적 절차와 교단과 교회의 법은 허울에 불과하다. 그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들이 정한 자신들만의 율법만을 믿는다. 그 율법을 따르는 사람들이 자기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런 근본주의자들의 습관은 최종적으로 하나님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한 교회에서 행사를 위해 각 선교회별로 대표를 뽑아 회의를 진행했다. 그런데, 그 대표 가운데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성도가 있었다. 그 성도는 본인도 동의하여 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을 매번 회의가 끝난 후, 다른 모임에서 결정을 번복하는 이야기를 하거나 회의에서 진행된 사적인 내용까지 전한다. 그는 모두가 합의하고 결정한 내용을 교묘히 조작하여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만들어 다른 대표들을 선동한다. 그러자 회의는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비춰지고 끝내 그 행사는 근본주의자 한 성도 때문에 열리지도 못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근본주의자들의 터무니없는 무책임한 불신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믿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을 두고 한 매체는 기독교가 아니라 ‘카톡교’라고 부르기도 했다. 교회 안에 근본주의자들 중심으로 가짜뉴스를 퍼 나르면서 진실을 호도하고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현상을 두고 나온 표현이다. 그들은 서로 다르지만 함께 해야 하는 교회의 동료들을 믿지 않는다. 매일같이 오는 카톡의 가짜뉴스만 믿고, 그 페이크뉴스에서 말하는 ‘하나님’만을 믿을 뿐, 이웃과 타인이 만나 고백하는 하나님은 부정하고 거부한다.

자기들만이 보는 카톡의 가짜뉴스 속에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베이컨의 우상론과 같은 오류에 빠져 산다. 거짓과 선동, 조작과 가짜 뉴스에 빠져 신앙이 아닌 또 다른 신흥종교처럼 살아가는 현대의 근본주의자들은 더 이상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그들은 그들만을 받아 주는 교회나 모임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보여주는 반사회적 모습은 사실상 교회 전체를 부정적으로 비추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한국교회는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면서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교회가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사명을 가진 공동체라면, 근본주의 기독교는 연합과 협력이 아니라, 극복과 변화의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

예수그리스도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이후에 예수 수난 고백에 대해 베드로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자, “사탄아 물러가라”(마 16:23)고 강력히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가 아니기에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함께 할 대상과 그렇지 않을 대상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교회의 바른 사명을 지켜내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선교적 측면에서 근본주의의 신학은 해악이다. 극복하거나 단절해야 한다. 할 수 없다면, 미국 교회처럼 근본주의 신앙이 기존교회에 자리 잡을 수 없도록, 자연스럽게 신학적, 목회적 우위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근본주의 신앙에 대해서 교회가 미적거리면 반드시 한국교회는 세상에서는 아무도 관심 없는 외딴섬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이전까지는 근본주의 교회와 성도가 그랬다면, 이제는 교회 전체가 그렇게 될 것이다. 교회의 사명이 선교라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주저 앉아 선 안 된다.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 때문에 한국교회 복음화를 더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하늘의 심판대에서 할 수 있는 변명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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