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정통교회를 흔드는 실체, 근본주의를 파헤친다 (3)
[특별기획] 정통교회를 흔드는 실체, 근본주의를 파헤친다 (3)
  • 임희국 교수
  • 승인 2022.08.25 1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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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분단·분열의 1950년대, 한경직과 마삼락의 연합·협력의 에큐메니즘
글_임희국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교회사)

1950년대 세계 냉전 상황에서, 6.25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분단을 고착시켰고, 장로교회는 세 차례 교단 분열을 했다: ‘51년(고신), ‘53년(기장), ’59년(합동, 통합). 그때 그 시절의 냉전·분단·분열을 극복하고자 힘쓴 연합·협력의 에큐메니즘을 돌이켜 보고, 이를 통해 오늘의 교회가 나아갈 새 길을 찾고자 한다.

한국 장로교회 예장통합 교단의 전통과 정체성은 성경에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보수적 에큐메니즘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진보가 아니라 전통을 지키는 보수이다. “보수주의는 근본주의와 다르다”(김용준 목사). 이 글은 이 점을 역사의 사실(fact)에 근거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1. 1957년 장로교회 제42회 교단 총회의 결정 -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가”

제42회 교단 총회(1957년)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교단 정체성에 대한 결정이기도 했다. WCC 제1차 총회가 1948년 화란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되었을 때, 본 교단은 김관석 목사를 참석시켰다. 그 직후에 본 교단이 WCC의 정식 회원으로 가입했다. 1954년 WCC 제2차 총회가 미국 에반스톤에서 개최되자, 본 교단은 김현정‧명신홍 목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이 무렵에 본 교단 내에서 WCC에 대한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WCC가 세계 개신교 모든 교파를 하나로 합쳐 초대형 단일 교파를 만든다.”는 의혹이었다.

이에, 교단 총회의 정치부가 담화문((한국)『기독공보』(1954.5.24.))을 통해 해명했다: “WCC의 근본정신은 각 교파의 신조 통일을 의미함이 아니요, 각자의 신조를 존중하면서 (...) 각 교파의 친선과 사업협동을 도모함에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총회에서 대표를 파송하는 것은 우리가 고립주의를 택하지 않는 증거(이다). (...). 우리 총회의 기본노선은 신조 신경을 단일화시켜 교파를 초월하려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거부한다는 것이다. (...) 에큐메니칼 운동을 신조까지 단일화 시키는 교회 통일운동으로 해석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들의 견해인 것이다.”

그러나 고개를 치켜든 의혹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1956년 제41회 교단 총회는 ‘에큐니칼연구위원회’(위원장 한경직)를 발족하여 이 문제의 해결방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위원회는 한경직(위원장)·정규오(서기)·전필순‧유호준‧황은균‧박형룡‧박병훈‧안광국으로 조직되었다.

일 년 뒤, 제42회 교단 총회 석상에서 연구위원회는 “친선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이제까지처럼) 앞으로도 계속 참가하기로 하며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하여는 반대하기로 태도를 결정했다.”고 보고했다. 이것은 총회 정치부(1954년)의 3년 전 담화문 확인과 동시에 교단의 입장을 확고히 굳히는 내용이었다. 총회가 이 보고서를 채택하여 ‘WCC에 대한 완결된 입장’으로 정리했다.

한 번 더 정리. 세계 냉전 상황에서 6.25한국전쟁과 더불어 한반도 분단이 고착되던 시기에, 장로교회 교단이 두 차례 분열(‘51년, ’53년)되었다. 이러한 냉전·분단·교단 분열의 상황에서 본 교단은 제42회 총회에서 연합·협력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2. 한경직이 강조한 ‘한국 장로교회의 전통인 에큐메니즘’

장로교회 총회의 이 같은 결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WCC는 (세계 개신교를) 단일 교파로 만들고, 신(新)신학이며, 용공(容共)단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 현장에서 경험했던 김광현 목사(경북 안동교회)는 자서전 『나의 목회일생: 이 풍랑 인연하여서』 279쪽에서 당시를 회상했다: “6·25전쟁을 겪어 본 반공 국가에서 용공이미지는 적대감을 조성하는 최고의 무기였다. 신신학을 이단시하는 한국 교회의 정서가 있는데, 거기에다 단일 교회(교파)를 지향한다는 그릇된 홍보는 한국인의 당파심을 자극했고, 여기에다 하나 더 얹어서 천주교회와도 합하자는 것이라고 홍보하였다. 이렇게 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단시하고 적대시하게 했다.”

제41회 교단 총회 에큐니칼연구위원회 위원장 한경직이 선포하기를(『한경직설교집』 제4권, 112쪽), 한국 장로교회의 전통이 “연합과 협조의 정신”인데, 이 전통은 내한 선교사들의 상호 협조와 연합 사업에서 비롯되었으며 한글 성경번역, 기독교신문 발간, 찬송가 발간, 학교와 병원 운영 등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 연합과 협조의 전통을 한국 교회가 반드시 계승해야 하는데, 이 전통이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정신과 꼭 일치되는 것이다. 그 정신은 “우리의 신조를 그냥(잘) 지키면서 다른 교파와도 연합할 수 있는 일에 함께 연합해서 일에 협조하는 것이고, 이것이 에큐메니칼 정신”이라고 그가 설명했다.

한경직은 더 나아가서 ”이 에큐메니칼 정신을 반대하고 세계교회와 관계를 끊자는 사람들의 태도는 ①한국 장로교회의 전통에 반대되는 것이고, ②비성경적 태도이며, ③고립주의를 선택하는 것이며, ④독선적 배타주의이고, ⑤선교사들에 대한 배은망덕한 태도“라고 비판했다. 그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반대하는 사상이란 ”독선적 바리새주의“라고 지적했다. 다시 정리하면: 장로교회 제42회 총회에서 결정된 에큐메니칼 운동 참가는 선교사들의 연합과 협조의 정신으로 형성된 한국 장로교회의 전통이다.

한경직이 에큐메니칼 정신을 강조한 것은 그 당시 아시아의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에서 아시아 교회들의 “친목”(교제, 코이노니아)과 “협조”(연합 사업)가 매우 시급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1945) 직후 정치적으로 독립한 아시아의 국가들의 상황은 경제·사회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다. 이러한 정황이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이(=무신론적 유물주의자) 활개를 펴고 폭력적으로 활동하기에 적합한 환경이라고 한경직이 파악했다.

그래서 그는 아시아의 교회들이 서로 연대하고 협조하여서 공동으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자고 역설했다.(한경직의 설교 “동아정세와 그리스도인의 책임”(1958년 7월 13일 주일저녁예배), 『설교집』 제3권, 238-254; “같이 증인이 되자”(1959년 5월 31일 주일저녁예배) 『설교집』 제3권, 459-474.) 그러면서 그는 ‘동아기독교협의회’ 창립(1957)에 적극 협력하고 참여했다. 실제로, 1958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내란으로 말미암아 그곳의 교회들이 파손되고 피난민 교인들이 속출하자, 동아기독교협의회를 통해서 그는 아시아의 많은 교회들과 원조운동에 참여했고 또 한국 교회의 모금운동을 적극 독려했다(1,000불).

한경직은 또한 아시아의 교회가 비록 “신생(新生)” 교회이긴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소위 모(母)교회인 서양의 교회에 의존적으로 기대지 말고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서양(미국) 교회와 아시아(한국) 교회의 상호 대등한 수평적 관계의 연합운동을 강조했다. 1950년대 상황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는 것은 적어도 몇 세대 앞선 안목이었다. 그는 “협력이라는 것은 독립한 두 개체 사이에 성립하는데,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의존하는 관계라면 협력이 성립되지 아니한다. 에큐메니컬 협력이라는 것도 독립한 교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자립자강하는 교회였고, 8·15해방 이후에 외국(미국) 교회의 도움을 많이 입고 있는데, 이제는 독립하는 교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미래 교회의 지도자인 아시아(한국)의 신학생은 영·미국과 유럽으로만 유학가지 말고 이제는 아시아의 기독교 대학이나 신학교로 유학하여 이 대륙/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금까지는 미국과 유럽의 교회가 아시아에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이제부터는 아시아 교회도 미국과 유럽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만 흐르는 일방통행식 선교사 파송이 아니라 쌍방통행식 선교사 교류를 통한 대등한 선교 협력관계가 구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3. 장로교회 제3차 교단 분열(1959년): 예장합동(승동측), 예장통합(연동측)

1959년 장로교회 교단이 제3차 분열되었다. 제42회 교단 총회의 결정을 따르는 자들이 ”연동측“으로 모였고, 그 결정에 불복한 자들이 ”승동측“으로 모였다. 승동측은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기”로 했다. 반면에 연동측은 “WCC가 용공도 아니고, 신신학도 아니며, 더욱이 단일 교회(교파) 운동을 하는 단체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승동측이 예장합동 교단이 되었고 또 연동측이 예장통합 교단이 되었다.

교단이 분열되는 과정에서 연동측은, “헌법과 규칙에 따라 회의를 계속하여 총회 75년의 전통을 계승한다. 이제까지 제휴해 오던 외국 선교회와의 관계를 굳게 지킨다. 우리는 분열을 원치 않으며 총회가 하나 되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과 성의를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WCC는 -저들이(승동측) 주장하는 대로- ‘용공, 신(新)신학, 단일교회(교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화평과 통일을 위해서 WCC에 대표 파송을 정지하기로 한다.”고 결의했다. 이로써 연동측은 장로교회의 연합과 협력의 전통을 계승하는 정통성을 확인했고 또 훗날 승동측과 다시 합치는 문도 열어 두었다.

연동측이 예장통합교단으로 개회하고서 재차 결의했다: “WCC에 대한 견해 차이로 총회가 분열하기까지 했고, 그렇게 분열된 총회의 화합을 위하여 (미국) 남 장로회 선교부가 탈퇴를 제안했으니, 그 제안을 받아들여 WCC에서 탈퇴하겠다. 그러나 승동측의 요구대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폐할 수는 없다. 만일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폐하게 되면 WCC에서의 탈퇴는 물론이고 국내에 있는 모든 연합 사업(대한성서공회,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교육협회, 기독교방송,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기독학생회 등)을 중단해야 하며, 심지어는 내한 장로교회 선교부까지 거절해야 하므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전폐를) 수락할 수 없다.”고 밝혔다(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제44회 회의록 (1959)).

이 결의대로 예장통합 교단은 WCC에서 탈퇴했다, 그렇지만 국내 연합사업과 해외 교단/교파들과 교류 협력은 유지했다. 에큐메니즘 예장통합 교단이 출발했다.

4.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 마삼락의 설명

1960년 1월 14일 남 장로교 선교부의 주선으로 양측의 회담이 열렸다. 참석자는 연동측/예장통합에서 한경직 외에 10명이었고, 승동측/예장합동에서 권연호 외 11명이었고, 선교부측에서 인돈 외 8명이었다. 약 100명 정도 방청객이 참석했다. 그러나 협상이 결렬되었다. 2월 17일에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통합”(예장통합) 교단 총회가 개회되었다.

그런데 결렬 직후인 1월 중순에, 연동측 위원들이 보고 겸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승동측은 그동안 자기들에게 속한 교우들에게 선전한대로, 에큐메니칼 운동이 용공이요 신신학이며 단일교회를 지향하는 것이므로 전폐한다는 결의를 하자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화평과 연합을 파괴하는 ICCC 매킨타이어들의 책동에 따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서 ‘ICCC의 분열 책동’이 등장했다. 이 단체에 관하여 선교사 마삼락(Samuel H. Moffet)이 설명했다. 그는 평양 선교 개척자로 존경받는 마포삼열(Samuel A. Moffet)의 아들이다.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창립되었다. 주관자는 매킨타이어(Carl McIntyre)였다. 그는 오랫동안 회장직을 독점하여 이 단체를 사유화시켰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한국 장로교회가 이 단체와 관계를 갖게 된 것은 1950년 당시 고신측의 한상동, 박윤선 등이 매킨타이어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서 그가 만든 페이스(Faith)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때부터라고 한다(채기은, 『한국교회사』, 243-244).

마삼락이 “현대 기독교의 난관과 기회”라는 글에서 설명하기를, 먼저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를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와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NAE는 “개인적 관계를 중시하고, 기독인들로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친교로 친밀하게 하려는 것인데, 이것은 WCC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WCC는 모든 교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친밀케 하며 연합시키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WCC와 NAE가 사이좋게 지낸다. 그러나, ICCC는 NAE와 전혀 다른 기관이다. ICCC가 가는 곳 어디에든지 교회를 분열시키고 교인들에게 증오심을 심어주고 있다. ICCC의 대표인 매킨타이어는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정통장로교회’를 갈라 나갔고, 그다음은 정통장로교회에서 ‘성경장로교회’를 갈라 나갔고, 또 그다음은 성경장로교회를 분열시켰다.

이처럼 ICCC가 이르는 곳마다 그곳에서 정통을 표방하면서도 교회를 분열시킴으로써 교회를 약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그들은 실제 자유주의 경향으로 기울어진 교회에는 아무런 역할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매킨타이어는 “일찌기 브라질에서도 한국과 같은 분열을 조장한 사람”이라고 했다.

5. 예장통합 교단의 WCC회원 재가입, “보수주의와 근본주의는 다릅니다.”

장로교회 예장통합 교단이 누차 확인한 바는 ‘에큐메니칼 정신과 운동은 19세기말 이래로 내한 선교사들의 연합과 협력 사업에서 비롯되어 형성된 한국 장로교회의 전통’이다. 이 전통은 -1948년 WCC 창립 이전에- 이미 한국 장로교회에서 확립되었다. 이에, WCC가 용공이라고 주장한 것은 1950년대 냉전 상황에 기대어 그 상황을 이용한 것이고 이미 그 이전 세대에 이미 확립된 한국 장로교회의 에큐메니즘에 대한 무지의 소치였다.

이 당시 장로교회는 세계 냉전과 민족 분단이라는 시대의 고통과 고난을 끌어안으며 화해와 평화의 길로 나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세계 냉전과 한반도 분단 시대에 –화해의 소명을 감당치 못하고- 교단이 3차례 분열되었다.

그런데 예장통합 교단은 에큐메니칼 정신을 견지하고 이것을 전통과 정체성으로 담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단 분열은 영원한 결별이 아니라 다시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WCC에서 탈퇴했다.

1969년에 예장통합 교단 총회는 다시 WCC회원으로 가입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교단이 WCC회원으로 복귀했다. 이때 김용준 목사(서울 수송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원교회상”이라는 글에서 이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짚었다. 그는 “우리가 보수해야 할 내용이무엇인가?” 물으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독(립)로회(1907년) 교회설립 취지문에서 밝힌 대로 초대교회에서 유래한 개신교의 한국 교회의 전통과 네 모교회(母敎會)의 신경을 지키는 것이 곧 보수를 뜻하는 것이어야 함에도 1936년에 미국 북장로회에서 이탈해 나간 소수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인사들의 독선적인 맹종의 강요를 추종하는 것을 전통인양 생각했다는 것은 비록 일시적인 것이라 해도 큰 상처를 입게 된 것이 사실이다.(…) WCC적인 교회로 복귀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본래적인 모습을 지키는 것이므로 보수란 근본주의자들의 현혹에서 벗어나 옛날의 우리 교회의 운동을 이어받는 것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을 간추리면, 보수는 한국 장로교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고, 그 전통은 에큐메니칼 정신과 운동이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와 근본주의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근본주의는 독선적 행동을 일삼으며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다. 보수주의는 본래의 전통을 지키면서 배제와 분열 조장을 물리치고 연합과 협력으로 나가는 것이다.

김용준은 1907년 한국 장로교회 체제가 탄생하는 ‘독(립)노회’의 설립취지를 언급했는데, 그 노회록 서문에는 한국 장로교회가 미국, 캐나다(영국), 호주(영국) 장로교회 4개 교단의 에큐메니칼 연합과 협력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명시했다. 한국 장로교회가 선교사들의 에큐메니칼 협력으로 탄생하고 시작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경직이 ‘에큐메니칼 정신을 반대하고 세계교회와 관계를 끊자는 주장은 선교사들에 대한 배은망덕한 태도’라고 지적했다. 이에, 독(립)노회 설립취지문의 일부를 회의록 기록 그대로 옮겨 보고자 한다.

종합. 한국 장로교회 예장통합 교단의 전통과 정체성은 성경에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보수적 에큐메니즘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진보가 아니라 전통을 지키는 보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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